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7-09-19 17:40:06 IP ADRESS: *.13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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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계곡에는 볼 것도 많아라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6차 관악산 자하동천을 찾아서

 

/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더워도 너무 덥다. 그래도 201785() 아침의 [과천정부청사역] 11번 출구 앞에는 한국산서회와 더불어 관악산에 오르려는 사람들로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한다. 아니 이 삼복더위에 산에 가자는 사람들(한국산서회)도 비정상이지만, 굳이 그러자며 따라나선 사람들(참가자들)도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농담을 건네자 참가자들 역시 피식 피식 웃는다.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산악인 오은선이다. 그는 이번 회부터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런데 배낭도 메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다. 의아한 마음에 사정을 물었더니 며칠 전에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그래도 미리 참가하기로 약속은 한지라 오늘 동참은 못할지언정 인사라도 올리려고 잠시 나왔다고 한다. 활짝 웃는 낯이 아름다운 그와 함께 바삐 기념촬영을 하고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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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이남의 모든 산들을 거느린 뭇산의 우두머리

 

과천향교 초입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장빈 이사가 관악산의 지명 유래에 대하여 짧은 강의를 펼친다. 관악산(冠岳山, 629m)()’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천시지]에 실린 배우리(당시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놓은 모습처럼 보여서 () 모습의 산이라는 뜻으로 갓뫼(간뫼)’ 또는 관악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 이름에 ()’자가 들어간 마을에서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속설도 있는데 현재 이 산 기슭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서 있으니 얼추 맞는 것도 같다.

조선시대의 문헌 속에서 묘사된 관악산은 대개 도성에서 바라본 관악의 형상을 중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익(1681-1763)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한강 남쪽의 여러 산맥은 속리산에서 뻗어 나와 모두 서울로 머리를 숙여 조회한다고 하여 백두대간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홍직필(1776-1852) 역시 [관악산 삼막사 유산기]에서 한강 이남의 여러 산 중에 구경할만한 산은 많지만, 품평을 논한다면 모두 이 산의 아들과 손자가 된다고 하였다. 즉 관악산이야말로 한강 이남의 모든 산들을 거느린 뭇산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도성 쪽에서 관악산을 오르지 않고 그 맞은편에 있는 과천 쪽에서 이 산에 오르려 한다. 관악산의 정상을 중심에 놓고 보면 동남향의 두 계곡과 그 사이의 한 능선이 오늘의 답사 예정지이다. 등산로는 자하동천으로 잡았다. 현재의 과천향교 앞으로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언제나 수량이 풍부하다. 등산로 초입부터 물놀이하러 나온 시민들의 탄성과 웃음소리가 계곡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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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자하 신위의 우정이 어린 바위글씨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45)의 바위글씨 단하시경(丹霞詩境)’이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본래부터 약간의 붉은 기운을 띄고 있거니와 한때 글씨 위에 따로 붉은 색을 칠해놓은 듯 전체적으로 영험한 느낌을 준다. 추사 특유의 굵고 강인한 필체가 인상적이다.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뒤에는 오석산이라는 자그마한 야산이 하나 있고, 그 산 위에 추사 가문의 개인사찰이라 해도 좋을 화암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 뒤의 바위절벽에도 시경(詩境)’이라는 추사의 친필각자(親筆刻字)가 있다. 오석산의 시경과 관악산의 단하시경을 요리 조리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 번째의 바위글씨는 자하동문(紫霞洞門)’이다. 현재 이 계곡의 이름을 낳게 한 바위글씨다. 자하(紫霞)는 춘천부사 직을 버린 다음 이곳 관악산 계곡에서 여생을 보낸 신위(1769-1845)의 자호(自號)이기도 하다. 그는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추사와도 절친한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멀지 않은 추사박물관에는 추사의 인장들을 따로 모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성추하벽지재(星秋霞碧之齋)’라는 것이 있다. 성원 옹수곤,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정벽 유최관의 서재라는 뜻이다. 그들이 서재를 공유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증언하는 인장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자하동문이라는 바위글씨는 신위가 쓰거나 조성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앞서 거론한 단하시경단하역시 신위의 또 다른 자호가 아니었나 추정한다. 즉 신위가 자신이 사랑하는 계곡의 승경을 추사에게 보여주니, 추사가 그에 화답하여 단하시경이라는 글씨를 써주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하동문은 상대적으로 높은 바위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나무들이 무성하여 전체의 글씨를 한 눈에 보기가 쉽지 않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날, 계곡 건너편의 능선에 서서 멀리 마주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이런 명품 바위글씨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절벽 앞의 나무들을 조금쯤은 솎아내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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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의 시를 우암 송시열이 새기다

 

세 번째 바위글씨의 사연은 조금 길다. 고운 최치원(857-미상)이 남긴 시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가 [제가야산독서당]이다. 한국도교의 비조로 꼽히는 그는 이 시를 남기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이 시를 무척 아꼈던 듯하다. 우암은 이 시를 자신이 직접 초서로 쓴 다음 그것을 가야산 해인사 밑의 계곡 암반에 새겼다. 그리고 시의 말미에 우암서(尤庵書)’라고 써놓아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즉 이 바위글씨의 원본은 가야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관악산의 바위글씨는 어떤 경로로 새겨진 것인가? 우암을 흠모하던 과천의 유림들이 가야산에 가서 그의 글씨를 탁본해온 다음 그대로 모각(模刻)한 것이다.

네 번째 바위글씨는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이다. 이 역시 신위의 글씨가 아닐까 추정하지만 확언할 수는 없다. 동천(洞天)과 동문(洞門)은 어떻게 다른가.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뿐 대동소이한 개념이다. 본래 동천은 도교의 개념으로 신선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런데 유학자들은 도교를 이단시하였으므로 동천대신 동문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던 것뿐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바위글씨는 같은 선상에 있어 하나의 카메라 앵글로 잡을 수 있다.

사실 자하동문제가야산독서당그리고 백운산인 자하동천을 제대로 보려면 꽤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는 수고를 감내해야만 한다. 장소가 매우 협소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오르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번 인문산행에서는 먼발치에서 그 위치만 적시해주었다. 사전답사시 인문산행 진행자들끼리 오붓하게 올라가 찍은 사진들을 덧붙인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이어서 제가야산독서당위의 작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간당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라리 그 나무를 뽑아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약간의 클라이밍을 감행한 다음 가까스로 그것을 제거했는데 덕분에 흠뻑 젖은 흙세례를 잔뜩 뒤집어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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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암에 걸려 있는 위창 오세창의 글씨

 

아쉬워하는 참가자들을 달래어 연주암으로 향한다. 이곳 자하동 계곡은 관악산의 모든 계곡을 통틀어 가장 길고 수량이 풍부하다. 흰 바위와 맑은 물이 굽이치는 곳마다 탁족 나온 산객(山客)들이 그득하다. 우리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문 옛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계곡 상단에 무명폭포가 하나 있다. 대부분의 관악산 유산기를 다 뒤져보았는데도 이 폭포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이참에 하나 지어볼까 싶기도 하다.

점심식사는 옛 관악산장 터에서 하였다. 이곳은 국립공원도 아닌데 산장을 굳이 헐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든다. 연주암으로 오르는 옛 돌계단 옆으로 새로 조성한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윽고 연주암(戀主庵)이다. 탁 트인 너른 마당이 시원하다. 조선 태조(1335-1408)가 친히 이곳에 축대를 쌓아 호국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크게 중창한 것은 효령대군(1396-1486)이라고 한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현재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추사의 글씨임에 분명한 [무량수(無量壽)]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그러나 원본은 아니고 복제된 것이다. 대웅전 맨끝방 앞에 위창 오세창(1864-1953)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도 보인다. 전서(篆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산수일월가(山水日月佳)’라고 읽기 십상이다. 그러나 산기일석가(山氣日夕街)’라고 읽는 것이 옳다. 도연명의 음주시 중 한 구절인데 산기운은 해질녘에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 넓고 시원한 툇마루에 앉아 관악산의 일몰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의 깊은 여운을 가슴 깊이 느껴봤을 것이다.

이제 정상인 연주대를 향하여 더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너무 날씨가 더운 탓이다. 사실 관악산에서 연주대 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도 없다. 응진전이며, 마애약사여래입상이며, 매염정이며, 말바위며 볼 것도 많다. 하지만 모두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옆길로 빠져 하산하는 능선으로 올라탄다. 오랫동안 세칭 케이블카 능선이라 불렸으나 최근의 지도에는 자하능선이라 표기되는 암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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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절터와 문원폭포 그리고 마애상들

 

아기자기한 암릉들로 이루어진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오른쪽 계곡으로 빠지면 곧 일명사지가 나타난다. 일명사라는 절의 옛터가 아니라 이름을 잃은(逸名)’ 이름을 알 수 없는절의 옛터라는 뜻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연화문대석(蓮華紋臺石)은 관악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조각품이다.

일명사지에서 조금 내려오다가 다시 계곡으로 올라붙으면 곧 문원폭포와 만난다. 관악산에서 가장 웅장한 폭포인데 그 우측 상단에는 오래된 기도터와 옛 당집들이 즐비해 있다. 기도터에는 조악한 글씨체로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 새겨져 있다. 일행들은 폭포 앞을 떠날 생각이 없다. 아예 폭포 아래로 들어가 물벼락을 맞기도 한다. 하긴 어차피 땀으로 흠뻑 젖었으니 시원한 폭포수를 마다할 까닭이 없다.

코스를 많이 줄였는데도 아직 하산길에 볼 것들이 더 남아있다. 마애승상(摩崖僧相), 곧 부처가 아니라 승려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들이다. ‘밀양박씨 고업 미륵보살이라고 한글로 새겨놓은 승상은 일반 등산로에서 불과 몇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예전에는 못 찾아 무척 헤맸던 기억이 난다. 최근 들어 신자(信者)의 이름을 새긴 판석들이 부쩍 늘어난 것을 보면 그 사이에 이 미륵의 영험함이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용운암 마애승용군은 산을 거의 다 내려온 지점에 있는데 매우 미스테리한 작품이다. 용운암은 최근에 조성된 사찰이므로 이 마애승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별 다른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주변에 한글 혹은 옛한글로 새겨진 글자들이 많은데 이는 아마도 1972년까지 이곳에 있었다는 기도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유래도 알 수 없고 조성시기도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다섯 명의 얼굴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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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산] 201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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