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김시습의 수락산 시절
심산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독법(讀法)이 있다. 나름 오랜 세월 동안 김시습을 읽고 또 읽어오다 보니 내게도 그런 것이 생겼다. 나만의 김시습 독법이요 ‘내가 아는 김시습’이다. 그것이 기존학자들의 공인된 연구 결과나 일반인들의 막연한 선입견과 다르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퇴계가 김시습을 가리켜 색은행괴(索隱行怪, 궁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한다)라 폄훼했을 때는 당신 그릇이 그렇지 뭐 하며 끌끌 혀를 찼고, 율곡이 그의 행적을 두고 심유적불(心儒跡佛, 겉모습은 불교도였지만 속마음은 유교도였다)이라 얼렁뚱땅 눙치려들 때는 피식 웃었다. 만약 김시습의 면전에서 당신은 ‘절의의 화신’이요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면 그는 지레 손사래부터 쳐대며 버럭 화를 내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홱 돌아섰을 것이다. 내가 아는 김시습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가 방외무애(方外無碍)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시습을 하나의 직함으로 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바라본다. 내가 아는 김시습은 산시인(山詩人), 여행자, 풍류객, 사상가 등으로 나뉜다. 이 중 ‘사상가로서의 김시습’은 나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다. 그가 도교와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논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 정통한 이해와 혁신적인 재해석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동시에 나의 무지함에 좌절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나의 관심사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산시인 김시습, 여행자 김시습, 풍류객 김시습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산시인 김시습’이다. 실제로 나는 김시습 이전에도, 그리고 김시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김시습보다 더 많이 산을 노래한 시인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정 산명(山名)을 거론한 시도 많지만 그저 막연히 산중생활 혹은 산 속의 풍광을 묘사한 시들이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그는 한마디로 산사람[山人]이었다.
김시습이 수락산을 선택한 까닭은
김시습이 평생에 걸쳐 한 번 이상 올랐거나, 그 산자락에서 노닐었거나, 아니면 그저 먼 발치에서나마 조망하며 시를 남긴 산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김시습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다음의 다섯 산이다. 나는 편의상 이 산들을 열경오산(悅卿五山)이라 부른다.
양주 삼각산(현재의 북한산)은 그가 과거 공부를 하던 중 계유정란(1453년)의 소식을 듣고 양광(佯狂, 거짓으로 미친 체함)하여 방외(方外)로 나아간 산이다. 여행자로 살았던 20대 내내 10년 가까운 탕유(宕遊, 호탕하게 유람하다)의 세월을 보낸 다음 정착한 곳이 경주 금오산(현재의 경주남산)이다. 1463년(세조 9년, 29세)부터 1470년(성종 1년, 36세)까지를 김시습의 ‘금오산 시절’이라 부른다. 그가 한양도성 인근으로 올라와 방내(方內)를 기웃거리는 한편 운수선유(雲水仙遊)에 탐닉했던 곳이 양주 수락산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부터 1482년(성종 13년, 48세)까지를 김시습의 ‘수락산 시절’이라 부른다. 양양 설악산은 이른바 그의 ‘관동시절’의 배후와 같은 산이다. 말년의 김시습은 설악산 자락에 기대어 살았다. 무량사를 품고 있는 부여 만수산은 그가 현세의 삶을 마감(1493년)한 곳이다.
삼각산과 만수산은 각각 그의 출발지와 종착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관동시절의 김시습은 설악산 자락을 맴돌았지만 실제로 그 산의 깊고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지는 않았던 듯하다. 결국 그가 산 속의 깊고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오랜 세월 산중인(山中人)으로 살아온 곳은 금오산과 수락산이다.
김시습이 왜 금오산에 정착했었을지를 짐작해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금오산은 나라 안의 가장 빼어난 마애불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는 환상의 불국토(佛國土)다. 나는 금오산에 오를 때마다 그 시절의 김시습 역시 이 마애불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으리라 하는 상념에 젖어 절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김시습이 그의 전생애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정착해 살았던 곳은 수락산이다. 왜 하필이면 수락산인가? 첫째, 그 산이 한양도성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습으로 하여금 은둔과 창작에 몰두하던 금오산 시절을 접고 한양 인근으로 올라오게 한 가장 중요한 동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세조의 죽음이다. 세조가 죽고, 그 뒤를 이었던 예종마저 한 해만에 죽자, 당시 사대부들의 칭송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성종이 즉위한다. 김시습으로서는 이제 새 세상이 열리는가 하는 헛된 꿈을 꿀 법도 했다.
하지만 한양도성 인근의 명산이라면 누구나 삼각산 혹은 도봉산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김시습은 왜 이 두 산을 마다하고 굳이 수락산에 똬리를 틀었을까? 삼각산은 그에게 트라우마의 산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양광을 시작한 그 출발지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우이령을 사이에 두고 거의 연달아 솟아있는 산이다. 김시습은 대신 그 맞은 편의 수락산을 택한다. 내가 생각하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나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둘째, 김시습은 수락산의 폭포와 계곡에 반했다.
김시습이 사랑한 수락산의 폭포와 계곡
금오산 시절의 김시습은 은둔과 창작의 나날을 보냈다. 20대 시절 내내 한반도가 좁아라 하며 동서로 남북으로 치닫던 그 청춘의 뜨거운 피는 아직 식지 않아 때때로 자의식 과잉을 드러내며 자신 속으로 침잠하였다. 반면 수락산 시절의 김시습은 보다 밝고 개방적이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너무 늦었고 헛된 것이었지만 잠시나마 출사의 꿈을 꾸었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거정과의 교류, 남효온과의 우애, 환속과 재혼 등의 행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매월당집]의 편집자들은 김시습의 시를 시기별로 구분하지 않고 주제별로 구분하였다. 그 탓에 우리는 어떤 시가 어떤 시기에 어떤 장소에서 쓰여졌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그 덕분에 나는 그가 남긴 숱한 산시(山詩)들을 제멋대로 읽고 해석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김시습의 산시는 크게 기행시와 산중시로 나눌 수 있다. 산중시는 필시 오랫동안 한 산에 기거하면서 남겼을 터이므로 대부분 금오산이나 수락산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쾌하고 진취적인 시들은 아마도 수락산에서 쓰여졌으리라는 것이 나의 희망적 추론이다.
수락산의 폭포와 계곡에 심취하였던 김시습의 모습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그가 수락산에 들어와 최초로 기거하였던 오두막의 당호(堂號)가 폭천정사(瀑泉精舍)다. 김시습이 도연명에 화운한 시의 제목 중에는 아예 구체적인 표현이 나온다. 거성동폭포지정(居城東瀑布之頂). 나는 한때 성동폭포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폭포가 따로 있나 보다 하여 수락산을 포함한 서울 근교의 모든 산을 휘젓고 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한양도성의 동쪽에 있는 산(수락산)의 폭포 위에 살았다는 뜻이다. 여기에 박세당이 남긴 <유수락산시후서>(1677년)를 겹쳐놓고 짚어보면 이른바 매월당유지 즉 김시습의 옛집터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자명해진다. 곧 수락산 정상 바로 아래의 수락산장(현재는 한국산악회가 관리하고 있다) 혹은 그 아래 금류폭포 위의 내원암 근처일 것이다.
수락산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바로 그 산명 안에 있다. 수락(水落)이란 곧 폭포이며, 순우리말로는 ‘물떨어지’라고 한다. 수락산은 ‘물떨어지뫼’의 한자식 표기이다. 김시습이 이 산에 정착한 이유는 바로 그 폭포와 계곡 때문이다. 풍수에서는 산에도 면배(面背)가 있다고 한다. 즉 얼굴로 표상되는 앞면과 등으로 표상되는 뒷면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산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이 앞면이다. 수락산의 얼굴은 금류폭포와 옥류폭포를 안고 있는 청학골이다. 청학이란 신선과 관련이 깊은 용어인데, 이 청학골의 또 다른 이름이 옥류동(玉流洞)이다. 이희조의 <유수락산기>(1682년)에 따르면 이 계곡에 옥류동이라는 동명을 붙인 자가 바로 김시습이다.
수락산 계곡에서 신선처럼 노닐다
수락산에 입산할 당시 김시습에게는 분명히 숨겨진 포부가 있었다. 다시 출사하여 방내로 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헛된 꿈은 곧 옅어졌고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는 영원히 방외인으로 남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제 수락산에서 그에게 남겨진 일이란 산수를 즐기면서 신선처럼 노니는 것뿐이었다. 유선시명산(有仙是名山). 유우석의 <누실명>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이다. 김시습이 들어와 살면서 수락산은 명산이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수락산 시절부터 그가 즐겨 사용한 아호가 동봉(東峰)이다. 나는 이것이 수락산의 어느 특정 봉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락산 전체를 통칭한다고 생각한다. 즉 ‘수락산=동봉=김시습’이다. 김시습을 너무 흠모한 나머지 그의 아호와 정확히 대(對)를 이루는 서계(西溪)를 자신의 아호로 삼고 역시 수락산 자락에 기거했던 박세당의 다음 글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과 더불어 솥발처럼 높이 솟아있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나,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은 동봉이 으뜸이다.”(<유수락산시후서>).
김시습은 <자이(自貽)>라는 시에서 유년부터 노년까지를 아우르는 자신의 전생애를 산에 기대어 이렇게 노래한다.
少小遊名山 소소유명산 어릴 적부터 이름난 산에서 놀았을 뿐
甿俗不交好 맹속불교호 어리석고 속된 무리들과 어울리기 싫었네
晚居瀑布傍 만거폭포방 나이 들어서는 폭포 곁에서 살며
欲作淸溪老 욕작청계로 맑은 시냇가의 늙은이가 되려하네
이때 그가 늘그막에 그 곁에서 살고 싶다던 폭포는 혹시 수락산에 있지 않았을까?
그의 또 다른 시 <등산(登山)>은 오직 산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설레임과 기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산이라는 대상과 등산이라는 행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시를 남겼을 리 만무하다.
登山意未休 등산의미휴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 그치질 않으니
理屩更滶遊 이교갱오유 신발 고쳐 신고 또 즐겁게 놀아볼까나
내가 여지껏 가장 많이 오른 산은 북한산이다. 바위(암벽등반)에 한참 미쳐있던 청장년 시절의 대부분을 그 산에서 보냈으니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10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국립공원공단의 단속이 심해진 이후 내 스스로 등을 돌렸다. 그 다음으로 많이 오른 산이 바로 수락산이다. 현재까지 300번 이상 올랐는데 이는 물론 김시습 때문이다. 수락산의 모든 계곡과 능선을 샅샅히 훑으며 나는 김시습의 체취와 그가 남긴 시의 향기를 음미한다. 내가 아는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에 가장 행복했다.
산시인 김시습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시는 <십년(十年)>이다.
山阿眞隱前生願 산아진은전생원 산 언덕에 숨어살기가 전생의 소원이었는데
雲水仙遊此日歡 운수선유차일환 구름과 물 속에서 신선처럼 노니니 오늘의 기쁨일세
덧붙이는 글 김시습과 수락산에 대한 조금 더 상세하고 심도 깊은 논의는 졸저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바다출판사, 2019년)에 실려 있는 <오직 은선동만이 기이함을 떨쳤다>와 <동봉의 달이 서계의 물을 비추네>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책의 제2부 <유북한산기>에는 김시습과 삼각산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심산 작가, 심산스쿨 대표. 어린 시절부터 김시습을 좋아하여 그의 모든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나라 안의 높고 낮은 산과 계곡 그리고 잊혀진 고을들을 두루 쏘다녔다. 이따금 김시습의 시를 전각(篆刻)으로 새기는 ‘설잠시심산각(雪岑詩深山刻)’ 작업을 한다.
월간 [불광] 602호 2024년 12월호
스님이 된 선비, 매월당김시습
지난 몇 년 동안 내게 들어온 거의 모든 원고청탁을 거절해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귀찮아서. 그런데 월간 [불광]에서 김시습 특집을 꾸민다며 원고청탁을 해오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콜레오네 패밀리의 어법을 따르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원고를 쓰고보니 이건 일종의 프롤로그 혹은 출사표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남아있는 삶의 시간 동안 써볼까 혹은 써야겠다고 생각한 책들이 몇 권 있는데, 그것이 대부분 김시습과 관련된 것들이다. 대략 추려서 4권 정도 된다.
먼저 장편소설로 [금오산의 김시습]과 [수락산의 김시습]. 자료조사는 애저녁에 끝냈고 플로팅도 완결되었다. 그냥 쓰면 된다.
그 다음으로는 나만의 김시습 독법을 다룬 [내가 아는 김시습]. 원래는 [산시인 김시습], [여행자 김시습], [풍류객 김시습], [사상가 김시습], [방외인 김시습] 등 여러 권으로 나누어 써보려 하였으나 그 규모가 너무도 방대하여 그냥 한 권으로 압축해서 써볼까 생각 중이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의 시를 전각으로 새기고 짤막한 에세이를 곁들인 전각산문집 [설잠시심산각].
모두 다 준비는 제법 튼실하게 되어있는데 정말 집필할지는 미지수. 예전에 어떤 교수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심산은 글을 잘 써, 근데 문제는....노느라고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거야.”(ㅋㅋㅋ). 지금 생각해도 탁견(!)이다. 과연 죽기 전에 이런 책들을 쓸 수 있을지?
어제 집으로 신간 월간 [불광]이 배송됨. 아주 잘 나왔다. 전각작품을 본문 사이 사이에 배치해달라고 부탁했었으나 편집디자인상의 문제로 뒤에 일괄적으로 배치. 하지만 본문 사이 사이에 멋진 사진(유동영)들이 들어가 있어 만족. 온라인 열람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월간 [불광]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책이 발간되기는 한 모양인데 아직 집으로 배송받지는 못했다.
어떻게 실려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