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2-12-31 17:43:17 IP ADRESS: *.232.7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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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이 나라를 세운 것은 해녀들이다
제주올레 20코스 김녕~하도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였다가 비행기에 올라타니 이륙도 하기 전에 잠에 곯아떨어진다. 잠깐 눈을 붙였나 했더니 벌써 제주란다. 와인 코르크 스크류를 빼앗기기 싫어 배낭을 수하물로 부쳤더니 공항을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몽사몽 간에 수하물 콘베이어벨트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카톡에 불이 난다. 이미 공항을 빠져나간 김진석과 포항에서 내려온 윤석홍과 [제민일보] 기자 김정희다. 뒤늦게 배낭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 모두가 뛰기 시작한다. 약속시간에 늦은 것이다.   

김정희의 승용차에 올라타고 김녕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 내에 도착할 가능성이 없다. 나는 하루 전, 이틀 전에 온 일행들에게 카톡을 날린다. 30~40분 늦을듯, 뒤따라 갈 테니 먼저 출발하시압. 답신은 간결하다. 옛썰. 내가 본래 시간 약속에 엄격하다. 늦게 오는 사람은 놔두고 정시에 출발한다. 그런 내가 집합시간을 놓쳤으니 미안할 따름이지 먼저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품을 이유는 눈꼽 만큼도 없다. 아침식사도 못하고 오셨지요? 운전하던 김정희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불쑥 김밥을 들이민다. 서울과 포항에서 날아온 세 남자가 우적우적 김밥을 씹어 넘긴다.   

김녕 서포구의 20코스 출발점에 도착하니 겨울바람이 매섭다.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최상식만이 홀로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김정희가 차 트렁크에서 또 무엇인가를 꺼낸다. 데친 참소라와 하얀색 한라산(소주)이다. 뭐 이왕 늦었고 날씨도 추운데 이거나 비우고 출발할까? 올레 스탬프를 넣어놓는 나무 간세 조형물 위에 느닷없이 술판이 펼쳐진다. 배낭에서 시에라컵을 꺼내기도 귀찮다. 매서운 제주 바람과 잘 데친 참소라를 안주 삼아 모두들 선채로 한라산 병나발을 분다. 차가운 한라산이 목젖을 넘어 창자로 스며들면서 찌르르 전율을 일으킨다. 이 추운 날씨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온다.   

처음에는 한 두 시간 이내에 따라 잡겠지 했다. 비록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 걸음이 훨씬 빠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먼저 출발한 일행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대신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일군의 젊은이들과 여러 번 마주쳤을 뿐이다. 그들은 커다란 쓰레기 수거용 비닐봉지와 펄럭이는 파란색 깃발을 들고 있었다. 클린올레를 실천하고 있는 제주올레 이어걷기 이음단원들이다. 추운데 수고하십니다. 그렇게 말을 걸자 그들은 활짝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월정리를 통과할 즈음 일행과의 조우를 포기했다. 수 차례 통화를 했으나 서로의 위치를 상대에게 알려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각자 알아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레길에서 살짝 벗어난 어떤 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먼저 출발한 일행이 그곳에서 식사 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는 길에 인사를 나눴던 올레 이음단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사)제주올레의 안은주 사무국장도 그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안국장이 물었다. 저희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오신 거에요? 이럴 때는 빤한 답변이 정답이다. 그냥 걷다 보니 이렇게 다 만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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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한 옥돔정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얼었던 몸이 풀린다. 식당 사장님이 (사)제주올레와 이음단원들을 위하여 특별할인을 해준 가격에 우리 일행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편승(?)한 덕분에 무척이나 저렴한 가격이다. 식당 앞으로 나서니 우리 일행 중 한영실과 김지형이 제주방송(JIBS)과 인터뷰 중이다. 내일이 21코스를 개장하여 제주올레가 완성되는 날이라 매스컴들이 분주한 모양이다. 방송국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다시 이음단원들에게로 집중된다. 깔깔대며 웃고 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축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다시 신발끈을 조여매고 길을 나선다. 우리 일행과 이음단원들, 그리고 (사)제주올레의 일꾼들과 방송국 스태프들까지 모두 합하니 거의 마흔 명에 이르는 대부대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전국에서 불러 모아 함께 행군하게 하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제주올레다. 그렇다면 제주올레를 만들게 한 궁극적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바로 제주도다. 그렇다면 제주도를 제주도로 만든 것은 누구일까?   

그렇게 두서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뇌는 생각하고 눈을 풍광을 바라볼 때도 발은 앞으로 나아간다. 걷다보면 언제나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다. “눈은 게으르고 발은 부지런하다.” 저 능선까지 언제 가나 싶지만 그냥 걷다보면 바로 그곳에 닿아있는 경우가 많다. 길은 생각을 자아낸다. 걸음은 그 생각을 지운다. 걷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새 무념무상의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게 걷다보니 16.5 Km에 이르는 제주올레 20코스를 다 걸어 어느 새 종착점인 제주해녀박물관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잡힐듯 말듯했던 화두를 불현듯 깨우친다. 제주도를 만든 것은 해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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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들어가면 맨 먼저 해녀들에 대한 단편영화를 한편 감상할 것을 권한다. 평범한 다큐멘터리 영상물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제주를 만든 것은 해녀들이다. 박물관에는 해녀의 삶을 보여주는 제1전시실, 해녀의 일터를 보여주는 제2전시실, 제주바다를 보여주는 제3전시실이 있다. 일행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찬찬히 그 전시실들을 둘러본다. 그러면서 깨닫고,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제주도는 우리 국토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별개의 나라다. 그리고 이 나라를 세운 것은 제주의 해녀들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문직 여성이 바로 제주 해녀라고. 그들은 탐라가 육지에 복속되기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선사시대부터 그들의 ‘바다밭’에서 ‘물질’을 해왔다. 그 잘난 남자들이 학문을 논하고, 정쟁을 일삼고, 서로를 살육할 때도 그들의 물질은 계속되었다. 제주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가치들은 해녀들의 테왁망사리와 빗창과 고무옷에 빚을 졌다. 제주에서 태어났거나 제주로 흘러들어온 모든 남자들은 해녀들의 전복과 소라와 톳 덕분에 먹고 살았다. 제주올레가 지나쳐 온 그 모든 바다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해녀들의 숨비소리(해녀들이 잠수한 후에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로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들린다)로 가득 찼던 곳이다.   

제주 여성들은 자립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남성에 기대어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경제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스스로 자기 삶의 중심이 되어 의연하게 살아갈 뿐이다. 모든 제주 여성이 해녀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삶의 원형이 되어준 것은 해녀들이다. 어쩌면 제주도 자체가 거대한 여성 혹은 모성의 현신(現身)인지도 모른다. 이때의 여성은 예쁘장하고 가녀린 여성이 아니다. 용감하고 의연하며 오지랖 넓은 여성이다. 제주의 설문대할망 설화가 그렇고, 제주 해녀의 장엄한 물질이 그렇고, 현대 제주 여성들의 독립적 삶의 태도가 그렇다. 서명숙 이사장을 비롯하여 (사)제주올레 대부분의 일꾼들이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역시 전혀 의외의 현상은 아닌 것이다.   

20코스를 끝내고 하도 근처의 예쁜 민박집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밤이 깊어 간다. 하루 동안 보고 겪었던 풍광과 인물들이 화제에 오른다. 그리고 무엇이 이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제주올레로 불러 들였을까에 대하여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참여한 각자의 사정은 다르다. 어쩌면 현답이 있을 수 없는 우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는 제주올레를 걸으러 왔다. 제주올레를 만든 것은 제주도다. 그리고 그 제주도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해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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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스쿨] 2012년 12월 31일

신명희

2012.12.31 17:58
*.99.150.193
해녀박물관 2층 테라스 밖에서 바라보는 겨울 제주 바다가 참...시리지요! 그래서 더 좋을지도...^^
아....근처 세화장 튀김이랑 팥도너츠 먹고 싶다.

배영희

2013.01.06 12:55
*.169.163.105
지형과 영실이당~^^

이날 흐리고 바람불고 종일 으시시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두 슨상님은 워디쯤 오고 계시는겨?"
오전 걷는 내내 선생님 기다리다..점심때 식당에서 만났었지요~^^

바삭짭졸했던 옥돔구이와 방송국 마이크들이 생각나네요,
게스트하우스 푸른물고기 예쁜 집과 친절했던 젊은 부부도요..^^

이애리

2013.01.24 21:43
*.236.211.121
갑자기 생각나서 들어왔더니...역시나 제주를 다녀오셨군요~ㅎㅎ 다들 보고싶네요^^ㅎㅎ지형언니...한 번 보려고 했더니 여기서 보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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