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정한 등록일: 2009-12-09 18:10:20 IP ADRESS: *.47.19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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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야 뭐, 내가 인연의 끈을 맺은 인디라이터 2기 선배의 작품인데다가, 특강이 있다고 해서 부랴부랴 사서 읽었다.
사실, 인디라이터 동문들의 책은 모두 읽어봐야 하는데 천성이 게으른지라 제대로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동문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우선 프로필을 훑어봤다.
응? 인간이 달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찍었던 것과, 그 날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지나서 태어난 게 뭔 연관이 있지?
어쨌든 ‘딸’이 아니라 ‘또 딸’로 태어나셨단다.
프로필을 보면서 존경스러운 한 가지, 30년이나 일기를 쓰고 있다고 당당히 밝힐 수 있다는 것. 사실 일기쓰기만큼 어려운 게 없는데...

이 책은 임신일기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매일의 기록은 아니지만,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날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 병원에서 아기를 낳고 그 아기의 힘찬 심장박동을 느끼는 순간 끝이 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받게 되는 충격 그리고 작은 변화들, 아니 어쩌면 정말 큰 변화들을 잘 펼쳐놓았다.
몸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다양한 일들...
나는 십여 년 전에 딸아이의 탄생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내용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어느 집이건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집은 없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집안이 유지되고 세대가 이어지는 것이다.
내 방 책장 위에 노끈으로 꽁꽁 묶어서 쌓아둔 상자 어딘가 내 딸 수민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돌 전후까지의 기록과 용품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꽤나 꼼꼼하고 부지런한 수민이 엄마가 그 시절을 그냥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제일 먼저 큼직한 스프링 노트를 한 권 구입했다. 그리고 꼬박꼬박 신체의 변화며 병원에서 검진 받은 내용을 기록했고, 초음파 사진을 붙여두었었다. 수민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사용하던 용품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때가 되면 큼직한 상자에 하나씩 둘씩 넣어두었었다.
언젠가 수민이가 커서 ‘나 아기 때는 어땠었어?’하고 물어보면 꺼내어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수민이의 타임캡슐’을 만들어 두었었다.
그 때는 똘똘이라고 불렀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 나중에 이름을 지을 때까지 우리는 똘똘이라고 불렀다.

임신한 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새벽에 추어탕 먹고 싶다고 해서 차 몰고 새벽시장엘 뛰어가고, 어디어디서 파는 튀김, 그 중에서도 오징어 튀김, 고구마튀김과 계란말이만 사다달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바람에 퇴근길에 사서 들고 갔었다. 사들고 들어가면 영락없이 입맛이 달아났다며 밀어내어서 모두 내 차지가 되었고, 그 덕에 임신부와 함께 나란히 몸무게가 불어나는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뜨거운 여름이 되면서 기체조를 배운다고 한 아파트 사는 임신부들끼리 모여서 낑낑대며 땀 뻘뻘 흘리며 다녀오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배가 아프다고 투덜대는 걸 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한 층 위에 사는 부부는 남편이 새벽시장에서 일을 했는데, 수민이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었다. 어느 날인가 새벽에 진통이 오는데, 남편은 자리에 없고... 결국 새벽 세시에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결국 그 날 아기가 태어났고, 병원에서 아기 아빠로 오해를 사기도 했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친해진 몇 몇 집들이 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나 역시, 일 때문에 외출한 상태에서 다른 집에서 급하게 아이엄마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했고, 나도 서너 번 같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대신 데리고 가서 출산까지 이어진 건 딱 한 번이다.

그 며칠 후 똘똘이도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엄마에게서 탈출했다.
열여덟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꼬박 옆에 붙어서 같이 호흡을 했고, 그 덕에 지금도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으면 목부터 쉰다.
남자가 이럴진대 산모는 오죽할까?
수민이 엄마는 결국 허리를 다쳐서 디스크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보여주었을 때, 시뻘건 몸뚱이에 군데 군데 얼룩이 묻은 아기를 보며 첫 인사를 이렇게 했다.
“안녕? 네가 똘똘이구나.”
수민이는 내출혈과 황달증세가 있어서 3주 정도 입원을 했었다.
강남의 산후조리원에서 모유를 얼려주면 퇴근길에 그걸 들고 화곡동의 미즈메디 병원으로 달려갔다. 간호사에게 한주먹도 안 되는 노란색의 얼린 모유를 건네고, 젖병에 담아 먹이는 걸 보고 집으로 가는 생활을 했었다.

흠...
읽은 건 분명 임선경 작가의 [아내가 임신했다]이고, 지금 쓰는 것도 분명 [아내가 임신했다]의 리뷰인데, 온통 내 딸 태어나기까지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아마도 임신에서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대부분 비슷하고 사회문화적 환경이 비슷한 까닭이 아닐까?

오늘 뉴스를 들으니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꼴찌란다.
1.2명이 채 안 되는 수준이고 세계 평균 2.26명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어딘가는 7.4명으로 1위라고 한다.
물론 출산율이 높다는 것이 무조건 긍정적이지는 않다.
출산율 1위라는 나라는 기대수명이 55세 정도라고 하고, 우리나라는 남자 76세 여자 82세 정도라고 한다.
다시 말해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은 낮고 기대수명은 높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1.2명이라면 심각한 수치라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를 하나 낳는다는 것은 참 많은 걱정과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외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자녀 하나를 키우는 데에 들어가는 부담은 실로 엄청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키우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분수에 맞게 키워도 어쨌든 아이는 자란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가난하다거나, 어렵다는 건 모두 상대적이다.
전부 가난하게 쩔쩔매며 사는 나라에서는 삼시세끼 밥 굶지 않고 살수만 있어도 상대적으로 부유하다. 하지만 온통 돈으로 쳐 바르고 사는 나라에서는 그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그리고 아이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결국 그 아이의 인성에 영향을 미친다.
힘들게 아이를 낳아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기이해진 인성을 갖고 살게 하느니 낳지 않는 게 낫다.

제발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좀 어이없는 이유이지만, 다 읽고 난 지금...
이 땅의 모든 임신부와 그의 남편은 모두 이 책을 일독하라고 권하고 싶다.
온 집집마다 언젠가 현실이 될 [아내가 임신하는]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 필히 구비하라고...

사족...
편집상의 오류, 또는 실수가 눈에 띈다.
9월 16일 금요일 <산후조리를 둘러싼 골치 아픈 문제들>의 172~173페이지에 보면 일곱 개의 해결책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네 번째 해결책이 없다!
해결책 셋 다음에 바로 해결책 다섯으로 건너뛴다.

profile

심산

2009.12.09 19:02
*.12.65.186
세상에 아내가...임신하는 거보다 더 무서운 사건은 없다...ㅋ

김정한

2009.12.09 19:10
*.47.197.18
그렇죠.
가장 무섭고도 경악할만한 사건이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뭐,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나니 말도 통하고...
사귀어 볼 만한 친구를 하나 만들어주는데요.ㅋㅋ
profile

명로진

2009.12.10 11:59
*.192.225.244
맞습니다. 짝짝짝!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아내를 임신시킨 건 도대체 누굴까요?

ㅋㅋㅋㅋ

차민아

2009.12.10 16:53
*.131.155.106
정한씨가 도배하는 리뷰 중 제일 재미있는 듯... 정한씨 얘기가 많아서 인가?

김정한

2009.12.13 22:30
*.47.197.18
그 아내를 임신시킨 건... 정신나간 남편(??) 아닐까요? ㅋ
미나상~ 재미있다니 그나마 다행...^^
다혜님... 그런 책이...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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