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4-03 10: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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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커 겸 블루스 싱어 김형철을 아십니까

 

록커 겸 블루스 싱어 김형철(1961-2007)을 아십니까? 그는 저의 오래된 동갑내기 친구입니다. 처음 만난 것이 아마도 1980년대 후반쯤 되는 것 같으니까 벌써 그럭저럭 20년이 다 되어가는 인연이로군요. 멋지고 유쾌한 대구 사나이입니다. 노래를 엄청 잘 했고 술은 더 잘 마셨지요. 이 친구와 유쾌하게 웃으며 술을 마시다보면 대개 날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암이랍니다. 연초에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얼핏 전해 들었는데, 그 기간마저 다 살지 못하고 어제 아침에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리 저리 뒤적거려봐도 그의 부고를 알리는 신문기사 한 줄 볼 수가 없어, 나라도 홀로 그를 기억 속에 새겨두고자, 이 글을 씁니다.

 

김형철은 대구 출신의 가장 파워풀한 록커였습니다. 그는 1988년 자신의 록그룹 ‘신화창조’를 결성하여 언더그라운드 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했습니다. 당시에 불렀던 노래들이 [보이지 않는 꿈], [신화창조], [여운] 같은 곡들이었는데, 대부분 그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을 했고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샤우팅 창법으로 멋지게 불러 제꼈습니다. 1991년이 되자 그는 전설적인 블루스밴드 ‘신촌블루스’의 보컬리스트로 발탁됩니다. 신촌블루스의 역대 남녀보컬들은 그야말로 국내 최강의 라인업이었습니다. 남성 보컬들은 박인수, 이정선, 이광조, 엄인호, 김현식, 김형철로 이어져 왔고, 여성 보컬들은 한영애, 정서용, 정경화, 이은미 등으로 이어져 왔지요. 이를테면 그는 신촌블루스의 마지막 남성 보컬리스트였던 셈입니다. 김형철이 신촌블루스의 리드 보컬로 떠오르던 시절은 곧 김현식(1956-1990)의 마지막 세월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그는 곧잘 ‘김현식의 대타’처럼 인식되곤 했는데, 이 점이 그에게는 강점이자 족쇄였던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김현식의 그림자 속에 묻혀버리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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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이 신촌블루스의 정식 멤버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1991년이지만, 그가 신촌블루스에 합류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제게는 김형철과 김현식이 함께 소줏잔을 기울이던 자리에 동참했던 기억들이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김현식 선배는 김형철을 친동생처럼 이뻐했습니다. 당시에는 이 두 록커들 못지않게 저도 술이 꽤 쎈 편이어서 우리 세 사람은 죽이 잘 맞았습니다. 한번 모였다하면 그 자리에서 소주 20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웠지요. 언젠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신촌역 부근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대낮부터 주구장창 소주병을 눕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김현식 선배는 잔뜩 취한 목소리로 [빗속의 연가]를 서럽게 흥얼거렸고, 김형철은 [동백아가씨]를 구성지게 불러제꼈지요. 소주로 병나발을 불어대며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들려주는 라이브 음악을 듣는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들은 왜 그리도 슬픈 노래들을 많이 불렀는지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름다웠던 시절입니다. 이제 김현식 선배를 따라 김형철마저 떠나가 버리니 참으로 아득한 기분입니다. 이제 누구와 마주 앉아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소주잔을 기울여야 할지...남겨진 세월이 참으로 삭막해 보일 뿐입니다.

 

김현식 선배가 죽었을 때는 우리 모두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병원에서 몰래 도망쳐 나와 우리와 술을 마셨습니다. 이 놀라운 가수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이제 그가 남긴 공백을 메꾸는 역할은 고스란히 김형철에게 돌아왔습니다. 김형철은 기꺼이 그 일을 해냈습니다. 1992년에는 김현식 추모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의 주연을 맡아 영화배우로도 데뷔했습니다. 당시의 스태프들을 돌이켜보니 또 다시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시나리오는 [오렌지]로 유명한 소설가 정정희가 썼고, 연출은 [회색도시]의 안재석 감독이 맡았습니다. 조감독은 훗날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를 만든 이정향이었고, 영화음악은 물론 신촌블루스의 맏형 엄인호 선배의 몫이었습니다.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영화 속의 김현식은 김형철이었고, 그의 상대역은 심혜진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 영화배우로서의 자질을 증명해낸 김형철은 1999년 다시 한번 스크린에 모습을 비춥니다. 당시 저예산 영화의 새로운 돌파구로 주목 받았던 김유민 감독의 [노랑머리]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그는 이재은의 상대역으로 출연하여 데카당트하고 퇴폐적인 사내의 어두운 심연을 섬찟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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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이 솔로 앨범을 낸 것은 1993년이었습니다. 이 앨범의 제목은 그냥 심플하게 [김형철 KIM HYUNG CHUL]이었습니다. 엄인호 선배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기적소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이 앨범의 [저물 무렵]과 [사랑했던만큼]을 들으면 술을 마시고 싶어집니다. 그만큼 우울하고 쓸쓸하고 가슴 시린 노래들입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대중의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 1997년에는 그의 두 번째 앨범 [신화창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만, 이 역시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가 그에게는 좌절의 세월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즈음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낙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조그마한 ROCK BAR를 경영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낙담한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친구들에게도 그것은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따금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여기 재능과 열정이 넘쳐나고 누구보다도 성실한 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조차도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은 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 것일까요. 속 시원한 답변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하릴없이 술병만 기울였을 뿐입니다.

 

그러던 김형철이 지난 겨울, 모처럼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서울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제 본인이 직접 노래 부르겠다는 생각은 잠시 뒷전에 밀쳐두고, 후배 가수들을 위한 프로듀싱과 매니지먼트에 전념해 보겠다는 새로운 포부에 한껏 들떠 있었지요. 역시나 우리와 동갑내기인 친구가 경영하는 작은 술집에서였는데, 신촌블루스의 전멤버 정경화와 함께 무척이나 즐겁게 술을 마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아주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일듯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그 어떤 항변도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게 남겨진 일이란 너무도 단순합니다. 너무 단순해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를 추억하고, 그를 보내주는 것 밖에는...달리 할 일이 없네요. 김형철은 지금 대구 영남대학교 부속병원의 영안실에 누워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발인을 한다고 하는군요. 오늘 밤에 저는 대구로 내려갈 것입니다. 아마도 술을 많이 마실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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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의 솔로앨범들은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목소리는 신촌블루스의 몇몇 앨범에 남겨져 있습니다. [신촌블루스 4집]의 메인 보컬이 김형철입니다. 엄인호 선배가 만들어서 김형철에게 준 곡들이 [내 맘 속에 내리는 비는], [밤마다], [기적소리]인데 모두 다 썩 훌륭합니다. [신촌블루스 라이브앨범]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역시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엄인호 솔로앨범 [엄인호 SING THE BLUES]의 대표작 [첫사랑]은 그의 매력을 담뿍 담고 있는 곡입니다. 엄인호 선배가 리드 보컬을 맡고, 김형철이 백 보컬을 맡았으며, 정경화가 특유의 임프러바이제이션으로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곡인데,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세 명의 보컬들이 참으로 멋지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작가는 작가로서 기억되길 원하고, 가수는 가수로서 기억되길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로 기억되길 원할 것입니다.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건 지금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건, 기회가 된다면 그의 노래를 한번쯤은 들어보세요. 그리고 나서, 흠, 이 친구, 노래 정말 잘 하는군, 하고 고개 한번 끄덕거려 준다면, 제 친구 김형철은 다른 세상에서나마 기쁨에 겨워 활짝 웃을 겁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먼저 떠나가는 친구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형철아, 어제 소식을 듣고, 잠시 망연했었다. 오늘 새벽까지도 술을 마셨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아 일찍 깨버렸다. 그리고는 이른 아침에 내 집필실로 나와 이 글을 쓴다. 네가 대구에 내려가 있을 때 한번 찾아가보지도 않은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한번 내려와, 팔공산도 아주 근사해, 같이 산에나 가자, 그렇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네 목소리를 듣고 어 그래, 조만간 내려갈께, 그렇게 지키지 못한 약속만 남발한 내가 너무 밉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형철아, 이 세상에 남은 미련과 회한, 다 훌훌 털고 맘 편히 가라. 너는 멋진 남자였고 훌륭한 가수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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