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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24.03.12 16:02

[비트]에 대한 평론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 김영진의 평론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2019년에 한겨레와 CJ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한국영화 100을 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쓰여진 글입니다. 아래에 전문을 올립니다. 이 글 안에는 나레이션에 대한 오류가 있는데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갇힌 채로 타버린 불꽃, 누가 청춘을 찬란하다 했는가

 

등록 :2019-10-10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53) 비트 감독 김성수(1997)

 

천부적인 싸움꾼 민(정우성)은 고등학교 중퇴 뒤 친구와 분식집을 차리며 소박한 삶을 시도하나 폭력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비트>10대 사내아이들이 거리에서 패싸움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 주인공 이민(정우성)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나는 아직 꿈이 없었다. 열아홉살이 되었지만 내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태수(유오성)와 어울려 다니며 툭하면 싸움질을 벌였다. 그게 전부였다.” <비트>는 사춘기 마초들의 허장성세를 잔뜩 전시하는 활달한 초반부를 지나 너무 일찍 삶의 궤도에서 하강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불행을 격하게 응시한다.

 

천부적인 싸움꾼 이민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조직범죄 집단에 몸담은 태수의 권유를 물리치고 또 한명의 절친 환규(임창정)와 자그마한 분식점을 차리지만 사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다. 성적을 두고 경쟁하던 친구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요양원에 들어갔던 여자친구 로미(고소영)가 민을 다시 찾아오자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해진 민은 태수의 조직에 싸움꾼으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폭력적인 세상에 응대할 방법이라곤 폭력밖에 없는 현실 앞에 민은 정직하다. 민의 친구들은 다들 지금보다 나은 자신의 삶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지만 민은 그걸 믿지 않는다.

 

허영만의 만화를 영화화한 김성수 감독은 <비트>로 독특한 누아르 청춘영화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억압받지만 밤이면 폼을 잡고 술과 담배에 취한 어른 흉내를 내며 에너지를 분출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폭력의 순환 속에 타오른 불꽃의 허무한 재뿐이다.

 

김성수 감독은 김형구 촬영감독, 이강산 조명감독과 팀워크를 발휘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1500컷이 넘는 화면의 속도감과 스텝 프린팅(저속촬영 뒤 특정 부분을 반복 복사해 슬로모션 느낌을 주는 기법)을 응용해 거칠고 툭툭 끊어지는 인상적인 액션 장면을 선보였다.

 

이 영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이민을 연기하는 정우성이 심야의 거리에서 두 손을 놓고 바이크를 타는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깔린다. “속도감이 최고에 도달하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하나의 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하지만 저 소실점은 다가갈수록 더 멀어져버리지.” 청춘의 질주가 갖는 매력과 공허를 아름답게 응축한다.

 

김영진/평론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