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17 13:39:19 IP ADRESS: *.147.6.178

댓글

1

조회 수

3423

[img1]

너무 정직한 것도 피곤해

[위험한 여인]의 마사

 

얼마 전 한 친구에게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내 오피스텔을 며칠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캐묻자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바람을 피워왔는데 그 사실을 마누라한테 이실직고했다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녀석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너 그러면 잘 했다고 칭찬받을 줄 알았냐?

영화 [위험한 여인]은 너무 정직해서 주변 사람들을 난감한 상황에 빠트리는 여성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영화를 ‘발견’한 것은 나만의 경로를 통해서였다. 볼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허공에의 질주]라는 영화에 홀딱 반해 그 작품을 쓴 여성 시나리오작가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 작품 리스트)를 뒤지다가 찾아낸 작품이었다. 행여라도 이 칼럼을 읽고 비디오를 빌려봤다가 욕을 바가지로 해댈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영화는 그저 그렇다. 다만 데브라 윙거가 찬탄할만한 연기력으로 소화해낸 마사라는 캐릭터만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다.

마사는 일찍 부모를 여윈 이후 의원보좌관으로 일하는 숙모(바바라 허쉬)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노처녀다. 마사의 직장은 허름한 동네 세탁소인데 그녀가 그곳에서 해고당한 경위가 가관이다. 세탁소 주인 앞에서 이제 막 옷을 찾아가려는 손님에게 그 옷이 제대로 드라이크리닝 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힌 것이다. 세탁소 주인과 동료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마사가 어찌나 끈질기게 진실을 밝히는지 나중에는 손님마저 곤혹스러워 한다. 손님의 표정을 보면 그는 “설사 네 말이 진실이라도 나는 상관없으니 이제 좀 그만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주인은 마사를 해고하고, 마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대든다. 나는? 나 역시 주인의 편이다.

그뿐 아니다. 세탁소에서는 늘 잔돈푼이 도난 당하는 사고가 잇달았는데, 마사는 그 범인이 동료 여직원의 껄렁한 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앞뒤가 꽉 막힌 마사는 해고통보를 받자마자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범인을 지목한다. 그러나 좀도둑은 그 죄를 마사에게 뒤집어 씌운다. 정직한 마사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그후로 마사의 편집광적인 진실 밝히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틈만 나면 동료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네 애인이 좀도둑이라는 ‘진실’을 되풀이해 떠들어대지만, 당사자는 그녀의 전화질이 지겨울 뿐이다.

영화 속에 등장해 그녀의 첫사랑이 되는 떠돌이 잡역부 청년(가브리엘 번)은 마사를 “순수함의 극치”라고 찬양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순수라면 나는 불순한 비순수를 받아들이는 편에 설 것이다. 마사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단세포적 반응 밖에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여인’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마사의 진실은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세상살이의 진실이란 어쩌면 보다 비루한 것일지 모른다. 거짓과의 적당한 타협에 대한 암묵적 합의 같은 것 말이다.

[동아일보] 2001년 8월 17일

최영화

2006.11.01 12:43
*.86.211.177
세상에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착하고(?) 미련한 물건들 이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26 이제 그만 오토바이를 멈춰라 + 3 file 심산 2006-06-18 4390
25 짝사랑에 빠진 편의점 소녀 + 2 file 심산 2006-06-18 4384
24 캐릭터 중심 시나리오의 절정 + 1 file 심산 2006-06-18 4330
23 문제에 봉착한 캐릭터 + 1 file 심산 2006-06-18 3850
22 비열한 거리를 통과하는 남자 + 1 file 심산 2006-06-12 3847
21 나와 함께 견디어줘서 고마워 + 5 file 심산 2006-05-31 3801
20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 1 file 심산 2006-06-17 3769
19 내가 모르는 나 + 3 file 심산 2006-06-17 3764
18 방탕한 청춘에겐 핑계가 필요하다 + 8 file 심산 2006-06-08 3735
17 정처 없는 영혼의 그녀 + 2 file 심산 2006-06-12 3658
16 사랑에 빠진 푼수 + 1 file 심산 2006-06-12 3509
15 자신 속에 갇힌 전문가 + 1 file 심산 2006-06-12 3503
14 파도처럼 살다간 반항아 + 1 file 심산 2006-06-08 3499
13 어떻게든 살아남을 놈 + 1 file 심산 2006-06-08 3474
12 모든 집안의 천덕꾸러기 + 4 file 심산 2006-06-12 3459
11 허망함을 직시하되 몰두하다 + 4 file 심산 2006-06-08 3434
10 미국의 모순과 분열 + 1 file 심산 2006-06-17 3433
» 너무 정직한 것도 피곤해 + 1 file 심산 2006-06-17 3423
8 다른 계급의 여자를 사랑한 남자 + 1 심산 2006-06-08 3361
7 생존과 야망과 원죄 + 1 file 심산 2006-06-06 3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