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4-24 16:42:52 IP ADRESS: *.215.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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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너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 와서는 정말 '인간적인' 고민만 합니다. 가령 냉장고를 열어보면서 저녁엔 뭘 해먹을까? 내일 아침에는 또 뭘 해먹지?...이런 고민(?)만 합니다...삶이 단순하고 분명해서 좋습니다.

저의 집 부엌은 전망이 꽤 괜찮습니다. 씽크대 바로 앞으로 잔디밭 마당이 내다보이고, 식탁과 맞닿아 있는 면은 아예 통유리로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어제 밤에는 돼지고기를 된장 푼 물에 삶아서 쌈 싸먹었습니다. 조금 질기긴 했지만...나름대로 맛 있었어요. 식사를 마친 딸은 영국 TV 시트콤을 보러 거실로 들어가고, 저는 서울에서 가져간 VIBE의 CD를 커다랗게 틀어놓고 설겆이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붉은 노을이 졌습니다. 해나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산에서 바라볼 때에도 그러하지만 자기 집 부엌에서 바라보는 것 역시 멋지더군요.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도 대여섯번쯤은 바뀝니다. 어제의 영국 하늘은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 쑈'였습니다. 낮은 흰구름, 낮은 먹구름,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던 햇살, 더욱 낮게 깔리던 회색구름, 그리고 붉은 노을이 가셔질 즈음 후두둑 내리던 짧은 소낙비...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차를 끓이며 빗방울 너머로 노오란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슬픔만도 아니고 찬탄만도 아닌,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동.

설겆이를 끝내놓고는 혼자 SHIRAZ를 한병 땄습니다. SHIRAZ...란 제가 좋아하는 와인용 포도 품종의 이름입니다. 저는 블렌딩되어 있는 와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일 품종으로 만든 것이 좋지요. 하지만 단일 품종이라해도 입맛이 영 엇갈립니다. 가령 CABERNET SAUVIGNON은 질색이고, MERLOT는 가끔씩 즐기며, PINOT NOIR는 이제 막 친해지려는 중입니다. 하지만 제 입맛에 가장 맞는 품종은 역시 SHIRAZ입니다. 뭐랄까 분명한 거리를 두는 냉정함, 가닿을 수 없는 그리움, 뜨거운 열정을 뒤로 숨긴 쿨함, 과장도 과소도 하지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즐기는 차분함...그런 느낌입니다. 아마도 인간의 혈액형으로 치자면 B형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격으로 치자면 현세적 비관주의자의 숨겨진 미소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아무튼 무척 맘에 드는 와인입니다. 언젠가는 SHIRAZ와 관련된 긴 글을 한번 써볼 생각입니다.

노을이 지고, 빗방울이 듣고,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풍경들을 부엌 앞 잔디밭에서 바라보면서...[TANGO LESSON]의 OST와 [VIBE SPECIAL ADDICT]를 들으며...SHIRAZ를 홀짝이고 있자니...야릇하게도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남미의 선율이 가슴에 와 닿으면 나이를 먹은 것이라고 하던데, 너절한 동어반복일 뿐인 유행가 가사가 귀에 들어오면 실연을 당한 것이라 하던데...어찌되었건 참으로 오랫만에 가슴이 저며온 저녁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가롭고 쓸쓸한 저녁시간을 앞으로도 많이 가질 수 있을지...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온전한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랫만에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쓰니까 참 좋군요...이런 게 바로 휴가를 즐기는 맛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서 보내는 휴가 이야기, 한가로운 이야기들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정원에서 찍은 저의 집입니다. 왼편 아래쪽에 있는 유리문이 부엌과 정원 사이에 나 있는 커다란 통유리창이고요, 그 위쪽에 보이는 창문이 2층 욕실에 딸린 것이지요.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던 날 한 컷 찍어놓았습니다.

2006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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