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0-16 01:56:18 IP ADRESS: *.12.6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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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제주올레의 ‘스토리’가 시작된 곳
제주올레 1코스 시흥~광치기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아니 남들‘만큼’ 할 수 있는 것을 딱 하나만 꼽아 보라면 그게 바로 ‘걷기’다. 사실 세상에 걷기보다 평범한 일도 없지만 걷기보다 비범한 일도 없다. 특히 ‘인간의 걷기’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우주사적 사건’이다. 두 발로 걷기, 유식한 말로 표현하여 ‘직립보행’! 현재의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통시적 안목을 가지고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세 가지만 꼽아보라면 직립보행, 불의 발견, 문자의 발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고 가장 놀라운 변화는 직립보행이다. 세상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짐승이 출현하다니, 덕분에 앞의 두 발(그러니까 두 손)이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도구를 만들 줄 알게 되고, 그 결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다니!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자부심으로 충만해야 마땅할 행위다. 두 발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축복 받은 존재다.

하지만 직립보행과 ‘여행’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쓸 데 없는 짓’이다. 만약 당신이 여행을 했는데, 그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잔뜩 폼 잡은 영어식 표현으로 ‘비즈니스 트립’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가까운 우리말로 옮기자면 ‘출장’이다. 인간이 ‘쓸 데 없는 짓’의 가치와 행복을 깨닫고 그것을 즐겨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빈프리트 뢰쉬부르크가 쓴 [여행의 역사]를 보면 그 돌연변이적 반란(!)의 과정들이 유쾌하게 드러나 있다.

여행 중에 최고의 여행은 ‘걷기 여행’이다. 최초의 여행 역시 걷기 여행이었다. 그 이후 여행은 차츰 업그레이드(?)된다. 걷다가 말을 타고, 마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우주선을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여행이 마차 여행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대책 없는 순응주의자다.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하여 미쳐 날뛰고 있는 자본주의의 맹신자요 소비자요 노예라는 뜻이다. 가장 훌륭한 여행은 걷기 여행이다. 가장 인간적인 특성인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자아’와 마주하고 오감을 최대한 발휘하게 된다. 레베카 솔닛의 명저 [걷기의 역사]는 인간이 어떻게 ‘걷기’를 통하여 ‘인간다움’을 얻게 되었나를 감동적으로 논파하고 있다.

걷기 여행의 극단이 등반이다. 등산과 등반을 어떻게 다른가? 두 발로 걸어 오를 수 있다면 그것은 등산이다. 네 발을 써야만 오를 수 있는 것이 등반이다. 그러므로 등반은 ‘인간 이전의 상태’와 맞닿아 있다. 그만큼 ‘원초적인 놀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걷기의 일종일 뿐이다. 고산등반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곳을 걸어가는 것이다. 암벽등반이란 무엇인가? 바위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걷기 여행의 극한적 형태를 알고 싶다면 이용대가 쓴 한국 최초의 세계등반사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를 읽어보기 바란다.

[img2]

극단적이지 않은 걷기 여행을 흔히 ‘트레킹(trekking)’이라고 부른다. 트레킹의 사전적 의미가 흥미롭다. “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 혹은 산, 들과 바람 따라 떠나는 사색여행.” 트레킹의 어원을 알아보면 더욱 매력적이다.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달구지를 타고 정처 없이 집단이주한 데서 유래되었다.” 산을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훌륭한 고산등반가도 훌륭한 암벽등반가도 되지 못한 나는 바로 이 트레킹을 즐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트레킹 코스는? 그것이 바로 제주올레다.

남 다른 재주도 없고 그래서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 대신 그래도 걷기 하나만은 자신 있다 싶은 나 같은 이들은 그래서 트레킹을 즐긴다. 나 역시 스스로를 트레커라고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내 삶에서 굳이 자랑할 만한 무언가를 억지로라도 찾는다면 “남들보다 트레킹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들을 여럿 섭렵했다. 그러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제주올레만한 트레킹 코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다채로우며 다정다감한 코스가 제주올레다.

하지만 풍광만으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힘들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간단하다. 스토리다.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이다. 사실 ‘스토리’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만큼 스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은 없다. 제주올레의 제1코스 ‘시흥~광치기’는 그 스토리가 풍성하다. 그래서 좋다. 다들 아시다시피 제주올레를 최초로 기획했으며 현재에도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주체는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이다. 그의 기념비적 저작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을 보면 왜 ‘시흥~광치기’가 제1코스로 선택되었는지, 이 코스가 품고 있는 숨겨진 스토리는 무엇인지가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주 남부해안부터 훑어나가는 게 순서다. 이왕이면 동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다면 그 또한 유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학교의 이름이 ‘시작해서 흥한다’는 뜻의 ‘시흥’이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제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름’부터 오른다. 그런데 이 오름을 끼고 있는 두 마을은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다름 아닌 ‘해녀들의 영역 싸움’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코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두 마을이 화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제주올레의 존재 가치를 웅변하며, 스토리텔링의 매혹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주올레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드린다. 제1코스 이외의 모든 코스들에도 이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그것을 만들어주시라. 그것은 단순히 ‘숙련된 스토리텔러’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울고 웃고 살고 죽으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제주도민들만이 풀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제주올레는 그 풍광만으로도 이미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가 되고도 남는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 걸맞는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이다. 이 부분만 뒷받침해준다면 명실공히 ‘세계인이 걷고 싶은 길 제1위’로 등극하리라 믿는다.

제주올레 제1코스는 심플하다. 시흥초등학교에서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말미오름과 알오름에 오른다. 제주 오름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새로운 산행’의 발견에 가슴이 뛸 것이다. 오름에서 내려다보는 제주 동해안의 풍광은 형언할 방법이 없다. 조선 여인네들의 조각보처럼 아름다운 그 풍광을 가슴 속에 품어두시라. 제주 동해안의 랜드마크인 성산일출봉의 빼어난 자태도 망막 깊숙이 새겨 넣으시라. 종달리를 벗어나 해안도로로 접어들면 이제부터 성산일출봉의 파노라마다. 방향을 틀 때마다 자태를 달리하는 성산일출봉은 그야말로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다.

[img3]

[제민일보] 2009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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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10.16 02:00
*.12.64.183
맨 위의 사진 속 종아리가 누구의 종아리인지 아는 사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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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홍

2009.10.16 10:52
*.229.145.41
왠지 느낌이 좋다^^

김만수

2009.10.16 13:37
*.9.179.7
야~ 역시 심산샘 글은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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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10.16 17:27
*.237.81.47
존경하는 두 분 산악인 선배님들께서 웬 과찬의 말씀을...ㅋ
그나저나 저 종아리의 주인공들은 이 홈피에 안 들어오나...?ㅋ

신명희

2009.10.18 20:33
*.184.197.28
가운데 사진이...신문에서는 다른게 사용되었던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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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10.18 20:55
*.110.20.80
응 사진을 4장 보냈어...그 중에서 알아서 3장 쓰라고...ㅋ

이진아

2009.11.10 02:09
*.33.63.54
바쁜 듯 빈둥대고, 잰 듯 느려터지고, 남보 듯 모르는 척하는 게 일상이 됐어요. ^^
담백하면서 다정한 매력이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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