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8-20 14:58:29 IP ADRESS: *.215.22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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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김홍성 시집, 문학동네, 2006

[img1]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시 한편에 가슴이 저릿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다시 산에서]라는 작품이었지요.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다시 산에서

친구여
우리는 술 처먹다 늙었다
자다가 깨서 찬물 마시고
한번 크게 웃은 이 밤
산 아래 개구리들은
별빛으로 목구멍을 헹군다
친구여
우리의 술은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이었다
온 길 구만리 갈 길 구만리
구만리 안팎에
천둥소리 요란하다

시인 김홍성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를 아주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데...곰곰히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한때 [사람과 산]의 편집자였고, 인도와 히말라야의 방랑자였으며, 네팔 카트만두에 '소풍'이라는 김밥집을 내고 그곳에 눌러살던 사람이었지요. 배경이 이러하다 보니 그의 허공집(홈페이지)에 자주 놀러가게 되었고...그러다 보니 마치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지요. 언젠가 제가 언급한 적이 있는 '히말라야 어깨동무' 사업도 그의 오지랖 안에서 탄생된 작품입니다. 그런 김홍성님이...오랫만에 새 시집을 상재했네요. 가끔씩은 태작들도 눈에 띄지만 여전히 비수와 같은 시편들이 곧장 가슴으로 날아와 박힙니다.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볼까요?

룽따가 있는 풍경

이 세상 낯설어
선잠 깬 아이 우는데
바람 분다
바람 부는 세상에 갇혀서
룽따가 나부낀다
울면 울수록 무정한 설산
울면 울수록 커지는 바람소리
더운 눈물은 찰나에 식고
또 배가 고프다
큰 독수리 날개 펼친다

룽따란...오색헝겁에다가 불경을 새겨넣은 바람깃발입니다. 히말라야 부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지요. 시를 읽는 동안 그 황량한 풍경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산으로부터 떨어져 있구나...하는 쓰라린 자책감(?)과 함께 말이죠. 최근 김홍성 님은 아주 커다란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저희 설산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던 그의 젊은 아내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내가 떠나기 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안거리처럼 느껴집니다. 엊그제가 그녀의 49제였는데...가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이번 시집에서 가장 강렬한 '방랑자의 노래'는 [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입니다. 가슴 속을 쾅쾅 울리는 광란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

벌판에서 태어나리라
드넓은 벌판 보리수 밑에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리라
김매러 나온 늙은 아낙 땀에 절어 찝찔한 젖 빨며
업둥이로 자라리라
물소 등에 앉아 풀피리 불고
벌판에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라리라
말라리아도 코브라도 콜레라도 굶주림도 겪어보리라
늙은 어미 먼저 죽고 없어도 혼자 살아보리라
맨발로 벌판을 걸으며 독수리 밥 빼앗아 날로 먹으며
벼락도 맞고 짱돌 같은 우박도 맞고 몰매도 맞으면서
질기게 살아보리라
한번 울면 천둥같이 울면서
한번 걸으면 백 리를 내달으며 설산까지 가보리라
설산 어귀에 이르기도 전에 자랄 건 다 자라리라
잔뼈도 주먹도 콧수염도 턱수염도 다 자라고
불알 두 쪽도 거치적거릴 만큼 자라리라
이제 무엇이 더 될까 고민할 만큼 자란 몸
벼랑 아래로 던지고 싶을 만큼 자라리라
굶고 또 굶어서 독버섯 먹고 미쳐서
벼랑 아래 몸 던지고도 안 죽고 살면 더 살아보리라
마을에 내려가 양치기네 곰보 딸 사위도 돼보고
애비 노릇도 해보리라 도적질도 해보리라
밤이면 집 없는 개를 껴안고 자면서
또다시 귀이개 하나로
뉴델리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코친
역에서 역으로 떠돌아보리라
세상 귓구멍 만 개는 더 후벼보리라
후벼낸 귓구멍마다 속삭이리라
이 세상 몇 번이고 다시 와서 살고 싶다고
다시 와서 이렇게 저렇게 닥치는대로 살고 싶다고
그리고 꼭 한마디 덧붙이리라
못 오면 말지요 라고

...김홍성 형님, 시 참 좋습니다. 형수님 먼 길 가시는데 배웅도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조만간 작은 탁자 위에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을 올려놓고 마주 앉아 곯아 떨어질 때가지 한번 마셔보고 싶습니다. 나팔꽃 피는 창가에 앉아서 말이죠...부디 몸과 마음 잘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심산 합장.

 

 

최관영

2006.08.20 22:12
*.102.206.181
음~ 좋네요!
profile

오명록

2006.08.21 07:44
*.252.119.22
내공이....필이 오네요...귀 후벼지는 남자의 노래를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저문강에 삽을 씻고..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데...그 마지막 구절이 생각나네요..직업(?)이 직업인지라...소리를 크게 듣는데...귀가 아프고 멍해질때가 있어요..제가 재주가 없어 제 귀를 제가 팔수가 없어...이럴때면 누군가의 무릎에 누워, 귀 파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ㅋㅋ 못파면 말지요..
profile

심산

2006.08.21 10:49
*.237.82.65
[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는..인도식 삶, 혹은 힌두교식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삶에 지쳤거나 그 의미를 알고 싶을 때 히말라야 설산으로 가지
정말 거기 벼랑 위에 앚아 명상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도 해
그래서 히말라야는 순례자들의 무덤이기도 한 거지
위의 김홍성 님 작품은 그런 삶을 한번 더 뒤집어 파고든 거고...^^

이미경

2006.08.22 00:55
*.188.24.93
저는 서정주 시인을 좋아해요. 매일매일 읽어도 가슴이 설레거든요. 어딘가 서정주님하고 닮은 구석이 있는 듯하면서도 참 다르네요. 참 슬퍼요. 카버의 소설을 읽는 듯한 슬픔...

이시연

2006.11.24 19:31
*.176.3.5
김홍성님, 시집을 고등학교 때 읽고 책장 한 켠 꽂아 두었었는데...꽃에 관한 시였어요.
가끔씩 꺼내 보곤 하죠.

목숨

바람 자는 틈을 타서
숨 죽이고 내려왔네
먼지 속에 꽃씨 하나

부부를 위하여

서로 바라봅니다.
눈을, 어깨를, 손과 가슴을 바라봅니다.
밝은 미소와 슬픈 눈물을, 기쁜 노래와 우울한 독백을,
또는 뒷모습이나 그림자도 봅니다.
고통스런 침묵의 날, 공연히 들떠서 낄낄대던 날, 불같이 치미는 분노의 날, 그리고 뜨겁게 안았던 밤이 지나갑니다.
휙휙 지나갑니다.
<중간 생략>
아주 늙어서, 호호백발로 똑같이 늙어서 등떼기 긁어 주며 놉니다.

<목숨>이란 시를 무지 좋아해서 자주 보고 외기도 했는데,
요즘엔 휙휙 지나갑니다. 그 구절 참 좋습니다.

그러다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인가 부인의 부고 소식과 더불어 신문에 기사와 사진이 나와서...
산에 사셨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죠...
그랬구나. 그 부인도 휙휙 세월 속으로 지나갔구나.
그랬는데,
아니 여기서 또 뵈니...
그냥, 참...
가슴 한 구석,
바람이 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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