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8-11 00:37:23 IP ADRESS: *.124.234.102

댓글

15

조회 수

3144



[img1]

길 위에서 에스프레소를 구하다
제주올레 16코스 고내~광령

글 사진/심산(심산스쿨 대표)

하도 뻔질나게 제주에 들락거리니 지인들이 자주 묻는다. 제주에는 언제 가는 게 제일 좋아요? 나의 공식적인 대답은 미리 정해져 있다. 사시사철 아무 때나, 태풍 불 때도 좋고 폭설 올 때도 좋고. 하지만 휴가를 낼 때마다 슬금슬금 상사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직장인들이 그런 빤한 대답은 집어치우라며 눈을 흘기면 보다 솔직한 모범답안을 내미는 수밖에 없다. 4월 아니면 10월, 그때가 하늘도 높고 꽃도 예쁘고 날씨도 좋아. 제주올레 16코스는 유채꽃과 벚꽃이 서로 자웅을 겨루던 올해 4월에 다녀왔다.

이번 올레길의 새로운 동행은 세 명의 남자다. 먼저 김주영은 나의 중학교 동창인데, 심산와인반 동문회인 ‘샤또몽벨’의 회장을 맡고 있다. 샤또몽벨이 활성화되고 지금처럼 화기애애한 커뮤니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음덕(蔭德)에서 연유한다. 얼마 전 그의 친형과 더불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가져온 와인이 1975년 빈티지의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였다. 웬 1975년?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해잖아, 1975년! 35년 묵은 다정한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축복이다.

나머지 두 명은 명로진인디반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다. 조한웅은 최근 떠오르는 인디라이터로서 크게 각광받고 있는 친구인데 데뷔작인 [낭만적 밥벌이]나 후속작인 [독신남 이야기] 모두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본명보다 필명 ‘키키봉’으로 더 유명한 이 친구에게는 ‘별 것 아닌 이야기(small talks)'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최근 야영에 재미를 붙여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니는데 이번의 제주행에서도 집채만한 배낭에 텐트까지 짊어지고 왔다.

그와 함께 ‘백작’이라는 작가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서승범은 최근 잡지사 기자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친구다. 찌질한 농담을 즐기는 키키봉과는 달리 듬직한 성품을 가진 그는 사진에도 제법 조예가 깊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친구가 단짝 야영멤버라는 사실이 내게는 일종의 미스터리다. 서승범과 길을 걷다가 우연히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저희 아버님이 예전에 소설을 좀 쓰셨어요. 아마 말씀 드려도 잘 모르실 거에요. 어찌나 심드렁하게 말하든지 나는 정말 그분이 무명소설가인 줄 알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정자, 인자, 쓰십니다. 으악! 나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아니 네가 서정인 선생님의 아들이라구? 전북대에 계시던? [강]과 [달궁]을 쓰신 바로 그 서정인 선생님?

신엄 도댓불과 남두연대를 지나 중엄새물 쯤 이르렀을 때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 못지 않게 문학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김주영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며 서승범을 타박한다. 아니 승범씨는 자기 아버님이 얼마나 유명한 소설가인지도 몰랐나 보네? 나 역시 와인잔을 홀짝거리며 계속 몰아붙인다. 그분,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셨어도 아주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하신 분이야. 특히 [달궁], 같은 제목의 연작소설을 거의 서른 편 넘게 쓰셨는데, 당시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어. 대화가 한참 무르익고 있는데 키키봉이 예의 그 뻘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엉뚱한 질문을 들이댄다. 저 그런데...이 근처에 어디 버너용 가스 파는 데가 없을까요?

[img2]

핸드프레소라는 야외용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20cm 정도 되는 망치처럼 생겼는데, 손으로 펌프질을 하여 압력을 높인 다음, 그 압력을 이용하여 커피 가루로부터 에스프레소를 뽑아내는 장비다. 키키봉이 새로 마련한 야영장비들 중의 하나인데 어찌나 자랑을 해대던지 모두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중이었다. 그는 어젯밤 한라산을 눕히며 호언장담을 했다. 내일 경치 좋은 데가 나타날 때마다 제가 즉석에서 뽑아낸 에스프레소를 음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핸드프레소를 작동시키려면 뜨거운 물이 있어야 된다. 키키봉은 버너도 준비하고 물도 준비했다. 그런데 물을 끓일 버너용 가스를 안 챙겨온 것이다.

김주영과 의남매지간인 신명희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한다. 흐이구, 키키봉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김영희가 얄미운 시누이처럼 끼어든다. 여기 소금빌레를 이용해서 뜨거운 물을 만들 수는 없을까? 이후는 코스가 끝날 때까지 이하동문이다. 수산리 저수지에 물이 가득 있으면 뭐하나, 뜨거운 물 한 고뿌가 없는 걸. 저기 사당에 한번 들어가 봐라, 누가 뜨거운 물 한 잔 바쳐놨을지도 모르잖니? 키키봉은 그럴 때마다 얼굴이 벌개져 가지고 여기저기로 뛰어다녔으나 결과는 매한가지, 허리춤에 매단 핸드프레소 기계만 덜렁거리며 돌아왔을 뿐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배가 아프게 웃어댔다. 고내에서 광령에 이르는 제주올레 16코스는 그렇게 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비실비실 걸었던 길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키키봉에게 최후의 반전 기회를 준 것은 항파두리항몽유적지였다. 유적지 입구의 편의점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뜨거운 물을 얻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한웅과 서승범 콤비가 숙달된 조교들처럼 능숙하게 에스프레소 커피를 뽑는다. 한 친구가 펌프질을 하면 다른 친구가 가루커피를 꾹꾹 눌러담고, 가느다란 분출구로 향긋한 커피가 나오면 다시 그것을 에스프레소로 아메리카노로 바쁘게 서빙해댄다. 일행들의 태도도 이쯤에서 돌변한다. 역시 한웅이는 훌륭한 청년이야. 야아...야외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정말 고마워, 너는 원래 뭘 해도 성공할 놈이었어.

코스 내내 화제의 중심이자 구원의 판타지(?)였던 커피를 마시자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맨 먼저 김주영이 꼬리를 내린다. 오늘 걸을 만큼 걸었고...이제 어디 가서 회에다가 한라산 한 잔 어때? 약삭빠른 최상식이 재빨리 그리로 붙고 곧이어 김영희와 신명희도 배신을 때린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각자 저 좋자고 걷는 길이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이 우리의 자유분방한 올레길이 아닌가.

결국 항몽유적지에서 다시 배낭을 지고 일어나 코스의 끝까지 완주한 사람은 나와 커피브라더스 두 사람 뿐이다. 더 이상 키키봉 놀려먹을 일도 없으니 걸음이 빨라진다. 항몽유적지 입구에 조성된 환상적인 유채꽃밭을 바삐 가로질러 청화마을로 내닫는다. 종착점인 광령에 제일 먼저 도착한 나는 길가의 중국집에 들어가 다짜고짜 요리부터 시킨다. 그리고 땀이 식기 전에 시원한 맥주 한 잔! 이것이 산행 혹은 여행을 할 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1원칙이다. 맥주 한 병을 다 비웠을 즈음 탕수육과 마파두부가 나오고 곧이어 커피브라더스가 도착한다. 이제 남은 것은 계속 껄껄대며 먹고 마시는 일 밖에 없다.

[img3]

[제민일보] 2010년 8월 28일

profile

심산

2010.08.11 00:52
*.124.234.102
진석, 이번 사진은 내용상 어쩔 수 없이 내가 찍은 걸로 올렸어!
이해해주기 바래...ㅋ

조한웅

2010.08.11 09:51
*.255.12.182
찌.질.한.농.담.을.즐.기.는...ㅡ,.ㅡ

신명희

2010.08.11 10:05
*.99.151.65
한웅아~네 옆에 있던 저!!!! 와인쿨러가 깜쪽같이 없어졌다니깐....와인 먹고 커피 먹고 그리곤....ㅠ.ㅠ

신명희

2010.08.11 10:08
*.99.151.65
앗! 그럼 저는 81년 빈티지와 89년 빈티지를 구해야 하는데.....81년은 가격이 헐~~~ ㅡㅡ;;;
profile

심산

2010.08.11 11:57
*.110.20.135
한웅아, 네가 '통큰 농담'을 즐기는 건 아니잖아...?ㅋㅋㅋ

서승범

2010.08.11 12:52
*.129.42.22
형은 뭘 해도 성공할 거야..

김진석

2010.08.11 12:53
*.12.41.21
심샘 별 말씀을 요. ^^

호경미

2010.08.11 12:59
*.165.196.84
ㅋㅋ 키봉오빠랑 승범 조합.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듯.
함께 하신 분들을 보니 정말 유쾌한 걷기였겠다는 게 짐작이 된다는. ^^

조한웅

2010.08.11 13:16
*.129.42.22
눈높이 토커는 그저 억울할뿐ㅜㅜ
profile

심산

2010.08.11 13:19
*.124.234.102
맨밑의 사진에 있는 저 키키봉의 핸드프레소!
제주올레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날...키봉과 승범이 저 걸(물론 신상품으로) 들고 내 집필실로 왔다
"백작 아이들이 돈을 모아 선물하는 거에요..."
아, 감동의 물결~~~ㅋ

그 핸드프레소를 이번에 프랑스로 가져간다!
백작 에브리바디, 쌩쓰어랏!^^

서승범

2010.08.11 16:02
*.129.42.22
낚시는 크게 당기지 않지만, 야영에 와인에 에스프레소까지...
우리도 캠핑 가면 똑같이 하는데, 왜이리 격이 다른거야?

김성훈

2010.08.11 16:03
*.116.250.225
승범형에 대해 또다른걸 알고 갑니다....
그러고보니 승범형 아버님 많이 닮았구나....^^

최준석

2010.08.11 20:04
*.152.24.74
커피 추출을 위해 앙다문 키키봉의 입술이 빛나는군요..^^
profile

명로진

2010.08.12 23:12
*.73.144.160
인디반이.....
심샘의 올레 길 엮은 글에 등장했다.
ㅋㅋㅋ
좋다. ^^

박선주

2010.09.04 13:56
*.33.43.60
날이 선선해지니 다시 걷고싶어지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3 송년특집 [명사들의 책읽기] 방송 안내 + 3 심산 2010-12-16 5121
132 프랑스의 작업남녀들 + 16 file 심산 2010-11-02 4188
131 심산이 찍은 프랑스 사진들(2) + 6 file 심산 2010-09-09 3328
130 김진석 in 프랑스 by 심산(2) + 5 file 심산 2010-09-09 2830
129 심산이 찍은 프랑스 사진들(1) + 15 file 심산 2010-09-01 2826
128 김진석 in 프랑스 by 심산(1) + 11 file 심산 2010-09-01 2550
127 심산 in 프랑스 by 김진석(1) + 19 file 심산 2010-08-30 3041
126 올레에서 올레로 섬에서 섬으로 + 9 file 심산 2010-08-12 2984
» 길 위에서 에스프레소를 구하다 + 15 file 심산 2010-08-11 3144
124 쾨글러 와인의 밤 미니사진전 + 1 file 심산 2010-08-10 2610
123 고내에 올라 한라를 보다 + 4 file 심산 2010-08-09 2766
122 단순한 초록의 위안 + 10 file 심산 2010-07-29 2685
121 KBS 라디오 [명사들의 책 읽기] 방송 안내 + 3 심산 2010-07-22 2918
120 남겨진 와인 속에 담긴 추억 + 7 file 심산 2010-07-15 2752
119 올레는 축제다 + 11 file 심산 2010-06-30 2509
118 힘찬 근육 위로 땀을 뿜으며 + 4 file 심산 2010-06-18 2475
117 공자를 거꾸로 읽다 + 8 심산 2010-06-04 3022
116 뙤약볕 아래의 삶과 죽음 + 6 file 심산 2010-05-19 2312
115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 물결 + 11 file 심산 2010-05-06 2407
114 사람과 사람 사이 + 7 file 심산 2009-12-24 2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