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8-09 22:00:11 IP ADRESS: *.124.23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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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고내에 올라 한라를 보다
제주올레 15코스 한림~고내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연일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내 생애 가장 무더운 여름이다. 단순히 덥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습도까지 높아 일본이나 홍콩의 날씨를 연상시킨다. 끔찍한 것은 이런 더위가 8월 내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런 이상기후 현상이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어 매년 반복되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우리가 저지른 패악의 빚을 받으러 온 셈이니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원망할 수도 없다. 그저 업보(業報)일 따름이다. 이런 날씨에는 한겨울에 걸었던 올레길을 되돌아보며 사진 속에서나마 찬 기운을 느껴보는 게 상책일지도 모른다.

제주올레 15코스는 금년 정월 초에 걸었다. 폭설이 내린 사려니 숲길과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한겨울의 정취를 흠뻑 만끽했던 나날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15코스를 걷던 날도 간간이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리고, 올레길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으며, 함께 걸은 일행들 모두 두터운 겨울옷으로 중무장한 상태다.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리움에 젖는다. 이리 저리 뒤엉킨 시절인연 덕분에 한겨울의 올레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번 올레길의 새로운 동행은 네 명의 여자들이다. 가장 오래된 인연은 전주에서 내려온 초등학교 교사 최상. 2005년 가을, 전주에서 약 서너 달 간 시나리오 워크숍을 주재한 바 있는데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녀는 이후 심산스쿨의 열혈 수강생이 되어 와인반, 인디반, 신화반, 사진반 등을 수료했다. 매주 전주와 서울을 오간다는 것이 꽤나 벅찬 일일 텐데도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멋진 아가씨다. 겨울방학을 맞은 그녀는 여중에 재학 중인 예쁜 조카 김나형을 데리고 제주로 와서 올레길에 동참했다.

오명선과의 인연은 참으로 절묘하다. 광치기에서 온평에 이르는 제주올레 2코스를 걷던 중이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대구 아가씨가 ‘우도에서 만난 흥미로운 아가씨’ 이야기를 해줬다. 서울 출신인데 우도로 놀러왔다가 몇 달째 그곳에서 주저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평에 거의 다다랐을 때, 이야기 속의 그 아가씨가 마치 마술처럼 내 앞으로 깡총 뛰어나왔다. 그녀가 바로 오명선이다. 오명선은 이후 나의 소개로 알게된 게스트하우스 사이에서 반 년 넘게 매니저로 일했다. 그러나 방랑벽이 도진 인간은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법. 틈만 나면 인도 타령을 해대는 그녀에게 마라도 기원정사의 혜진 스님이 새 길을 열어줬다. 스님이 인도에 세운 학교에 가서 일하며 머물러보라는 것. 오명선은 결국 인도로 떠났다. 제주올레 15코스는 내가 그녀와 함께 걸은 마지막 길이다.

마지막 동행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고명현이다. 그녀가 나의 시나리오 워크숍에 참가한 것도 극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영과 등산에 능한 그녀는 내처럴 본 아웃도어 걸이다. 사진 속의 그녀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봤더니 이 삼복더위에 지리산 능선을 걷고 있단다. 새로 맡게된 [한국기행]이라는 프로의 첫 번째 주제가 ‘지리산’이어서 보름 동안을 꼬박 지리산에서 뒹굴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못 말릴 아가씨다. 나는 전화기에 찬바람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15코스를 떠올리며 이가 시리던 겨울 바다의 바람을 다시 한 번 느껴봐.

[img2]

그들과 함께 걸은 15코스는 아름다웠다. 풍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들과의 인연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유쾌 발랄한 열 네 살의 소녀 나형이는 길이 방향을 틀 때마다 가파른 소프라노의 탄성을 냈다. 우리는 길이 아니라 그녀가 예뻐 웃었다. 한림읍 대림리를 지나갈 때였다. 길가의 비닐하우스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할머니 한 분이 다짜고짜 우리를 잡아끌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끌려들어갔더니 날도 차가운데 커피나 한잔 하고 가란다. 무엇을 사가라거나 이야기나 좀 나누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따뜻한 커피나 한잔, 그뿐이었다. 할머니가 손수 끓여주신 커피를 홀짝이자니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물론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인가. 문득 밥 딜런의 노래가 생각났다. 길 떠나기 전에 커피나 한잔(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15코스의 풍광도 물론 훌륭하다. 연못을 휘감는 버들못 농로, 배롱나무가 우거진 백일홍길, 끝내 돼지는 만날 수 없었던 도새기 숲길.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유쾌하게 치솟던 그녀들의 웃음소리 뿐이다. 최상과 오명선과 고명현은 그날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마치 십년지기처럼 만들어놓는 것이 바로 제주올레의 힘이다. 그 힘에 이끌려 우리는 홀린듯 걸었다. 그래서 눈이 녹아 질퍽해진 아스팔트 길도 추위 때문에 인적이 끊긴 을씨년스러운 골목길도 모두 즐겁기만 했다.

내 생각에 15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애월읍에 위치해 있는 고내봉과 그 둘레길이다. 봉우리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고내마을은 15코스의 종점이기도 한데, 제주도 전역에서 ‘한라산이 보이지 않는’ 몇 안 되는 마을들 중 하나다. 무엇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을지는 빤하다. 다름 아닌 고내봉이다. 해발 175미터에 불과한 고내봉이 남한 최고봉인 1950미터의 한라산을 가린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시인 이성부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쓴 165편의 시를 한 데 모아 산시집(山詩集)을 상재한 바 있다. 그 시집의 제목이 고내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그래서 고내마을 사람들은 고내봉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20분만 걸어 올라가면 고내봉 정상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야말로 최고의 경관이다. 탁 트인 전망 속에 한라산을 감상할 수 있는 마을 뒷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내마을 사람들의 특혜요 자부심인 것이다.

고내에 올라 한라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그 작은 산에 올라야 큰 산이 제대로 보인다. 그래서 작은 산이 더욱 소중하다. 우리들의 인연 역시 마찬가지다. 소소한 인연들의 실타래가 한 없이 뒤엉켜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하나 하나의 작은 인연들이 모두 소중하다. 그 인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이렇게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바로 제주올레의 힘이다. 제주올레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인연인 것이다.

[img3]

[제민일보] 2010년 8월 14일

최준석

2010.08.09 22:07
*.152.24.74
상언니 렌즈에 빨간줄..^^ㅋ 에효.. 다 때려치고 놀고 싶다..ㅠㅜ

최상

2010.08.09 23:48
*.182.96.160
눈 밑에 다크써클이 내려앉은채 골골골골 따라갔던 길이었지만, 선생님 덕분에 더 유쾌했어요.
(샘 막 저 죽어간다고 놀리시고선ㅋㅋ)
길도 길이지만 역시 동행의 힘은 참 좋아요^^* 사진 속으로 뛰어들고 싶네요...
(담에 준석언니랑 함께?^^)

최준석

2010.08.10 01:13
*.152.24.74
그럽시다~~^^

호경미

2010.08.10 09:36
*.221.212.232
^^ 좋다. 글도 사진도. 늘 그렇듯이 말이죠.
상이조카빼곤 다 아는 얼굴들인데, 표정이 밝아 그런지 더 이뻐보이네.

샘~ 샘이랑 걷는 길은 누구나 다 즐거움으로 기억할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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