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7-15 20:19:53 IP ADRESS: *.241.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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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남겨진 와인 속에 담긴 추억
제주올레 14코스 저지~한림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심산스쿨의 하나 밖에 없는 교실의 칠판 옆에 큼지막한 와인셀러를 들여놓자 당시 강의 중이던 김대우 감독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여기가 도대체 학교야 술집이야? 아침에 심산스쿨에 들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책상들은 ‘수업 대형’에서 ‘술집 대형’으로 헤쳐 모여(!)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칠판 앞에는 아이스박스들과 서른 개도 넘는 와인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들어줄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여기가 도대체 학교야 술집이야?

어제는 심산와인반의 월례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다른 와인 모임들은 뭐 세미나다 비교 시음이다 제법 학술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던데 심산와인반의 컨텐츠는 단순 무식하다. 그냥 먹고 마시고 놀 뿐. 계절이 계절인지라 어제의 메뉴는 생선회와 육회 그리고 화이트와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중간 즈음에 레드와인도 끼어들었고 끝내는 꼬불쳐둔 위스키까지 등장했다. 빈 병들을 주욱 훑어보자니 어제 최고의 화제(?)를 몰고 온 군계일학(!)의 와인병이 눈에 띈다. 바로 제주 월령 선인장마을의 헬스 와이너리에서 만든 ‘백년초야’다.

백년초 선인장으로 만들었다는 이 와인의 품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만 서른 개가 넘는 와인병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빈 병’이 아닌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만을 부기해 놓으니 독자 제현께서 짐작해보시라. 하지만 와인을 꼭 품질만으로 마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추억으로 마시기도 한다. 나는 남겨진 ‘백년초야’를 한 잔 따라 홀짝이면서 제주올레 14코스의 사진첩을 연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에 헬스 와이너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에는 그저 신기한 마음에 셔터를 눌렀을 뿐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최근 다시 찾은 제주에서 한 지인이 억지로 배낭 속에 쑤셔 넣어준 덕에 이렇게 만나게 된 와인이다.

백년초 와인을 홀짝거리며 사진 속으로 들어가 그 길을 다시 걷는다. 내게는 14코스의 사진첩이 2개 있다. 하나는 부슬비가 내리던 봄날에 나 홀로 걸은 길이다. 그 길의 추억이 와인 속에 어른거린다. 다른 하나는 높고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었던 가을날에 김진석이 걸은 길이다. 김진석사진반과 이윤호인문반의 친구들이 대거 출연하는 그 사진들은 ‘걷지 못한 길’에 대한 상상을 마구 불러일으킨다. 2개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이 길이 과연 같은 길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추억과 상상을 오가는 동안 와인잔은 연신 기울고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저지에서 한림에 이르는 제주올레 14코스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다. 용수 포구에서 시작하여 숲과 오름을 넘나들며 내륙으로 파고들었던 코스가 다시 돌담길과 하천길과 숲길을 통과하여 바다로 나아간다. 홀로 부슬비를 맞으며 걷던 그 길은 참으로 유장하고 고즈넉했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에서 당시 내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다. 얼론 어게인, 내처럴리(Alone Again, Naturally). 14코스는 어쩌면 ‘선인장의 길’이라 부를만도 하다. 코스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김정문 알로에의 계약재배농장을 지나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외래 선인장들은 비닐하우스에 갇혀있다. 나중에 만나게 되는 월령 마을의 자생 백년초들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img2]

이름도 예쁜 큰소낭 숲길과 오시록헌 농로 그리고 굴렁진 숲길을 지나자 드디어 바닷가에 자리 잡은 백년초의 마을 월령에 이른다. 사진작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곳에 이르면 누구나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게 된다. 참으로 독창적인 모습으로 뒤엉킨 채 바다와 하늘을 향해 가시를 곧추세우고 있는 백년초들의 자태가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바위 틈에 똬리를 튼 백년초도 신기하지만 집 담벼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백년초도 경이롭다. 이 마을에서는 뱀이나 쥐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렇게 백년초로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월령 마을부터 한림항까지는 ‘비양도 갤러리’다. 제주에 딸린 화산섬들 중 가장 최근(!)에 생성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천년 전의 일이다. 고작해야 백년도 못 사는 인간들로서는 상상의 저편에 속하는 거대담론이 눈 앞에 현현해 있는 셈이다. 발길을 옮기고 각도를 틀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비양도의 자태는 아무리 봐도 지겹지가 않다. 지겹기는커녕 저 섬의 구석구석에는 어떤 비경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 역시 제주올레의 후유증이다. 제주올레 덕분에 가파도와 추자도까지 드나들게 되면서 ‘섬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에 눈뜨게 된 까닭이다.

김진석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그들 역시 이 즈음에서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듯 하다. 사진과 낚시는 해뜰 무렵과 해질 무렵에 가장 좋은 결과를 얻는다. 사진 속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사진 속 풍광들에 노을빛이 비껴들기 시작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비양도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다. 이제 실루엣만으로 남은 그 섬이 추억의 갈피 한 켠에 조용히 각인되어 간다. 추억은 그렇게 잠시 몸을 숨겼다가 전혀 엉뚱한 매개체로 인하여 불현듯 되살아나는 법이다. 선인장 와인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을 목구멍으로 넘기니 나 홀로 걸었던 14코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한림항 비양도 선착장 부근의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때는 봄이었고 평일이었으며 하루 종일 부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14코스는 길다. 거의 20Km에 육박한다. 고어텍스 재킷을 걸치거나 우산을 써도 옷이 젖기는 마찬가지다. 선술집 탁자 위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행복한 피로감이 혼곤히 밀려온다. 저무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창문 앞 탁자에 앉았다.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전복회를 씹으며 묵묵히 한라산을 마셨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하루였다.

[img3]

[제민일보] 2010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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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0.07.15 20:24
*.241.46.86
맨 위의 사진을 작은 사이즈로 올려서 잘 안보이는데...사진 하단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백년초다!
근사한 선인장인데...와인으로는 글쎄...ㅋ

최아휘

2010.07.15 22:03
*.214.136.163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추억으로 마시기도 한다는 말이 와닿았어요.
선생님, 항상 건강하셔요.

신명희

2010.07.16 09:39
*.99.151.65
이번 주말은 어디를 걸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중이었는데 방금 결정했습니다. 14코스로! ^^
profile

심산

2010.07.16 14:53
*.110.21.44
맹희야, 월령에 들리거든 헬스 와이너리를 찾아 꼭 '백년초야' 한 잔 하그래이~~ㅋ

신명희

2010.07.16 15:24
*.99.151.65
찾아가면 시음해 볼 수 있나요? 궁금하긴 한데...샘의 글을 보면 저걸 마셔야 하나 하는 생각이...ㅋㅋㅋ

호경미

2010.07.17 09:37
*.12.33.217
그런 아이들은 떼낄라를 만들어야되나요? 물론 용설란과도 너무 다르게 생겼지만 포도보다야 비슷..^^
아... 명희언니... 나도 데려가라~ ㅠ

최준석

2010.07.20 09:37
*.152.24.74
정말 그 남았던 백년초야를 드시면서 쓰신건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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