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2-24 17:13:22 IP ADRESS: *.12.6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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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사람과 사람 사이
제주올레 제10코스 화순~하모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내가 가장 많이 걸은 올레는 화순에서 하모까지 이어진 제10코스다. 이 코스는 물론 경관도 아름답고 길도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이 코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떤 뜻에서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래가 그리 풀려나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실타래가 건물의 형태로 물화(物化)된 곳이 제10코스 중간 사계리 해안도로에 위치해 있는 게스트하우스 ‘사이’다.

본래 이곳은 프랑스어로 ‘바다’라는 뜻을 가진 ‘라메르’였다. 라메르를 인수한 일군의 사내들은 이곳을 특별한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이 찾아내고 벤치마킹할 대상으로 결정한 곳이 서울 홍대앞 북카페 ‘창밖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하루는 북쪽에서 하루는 서쪽에서’(이하 창밖)였다. 창밖의 주인은 심산스쿨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심산와인반동문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라메르-창밖-심산스쿨의 삼각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들을 즉각 의기투합하게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1980년대의 학생운동 혹은 노동운동 경험이었다. 시쳇말로 이리 저리 ‘족보’를 따져보니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창밖과 심산스쿨은 라메르의 리노베이션 작업에 참여했다. 표현만 번지르르한 ‘리노베이션 작업’일 뿐 사실은 우루루 떼거지로 몰려가 점거농성의 형태(?)로 펜션을 점거하고 앉아 와인이나 퍼마시는 모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새로운 이름이 정해지고 적용 가능한 컨셉들이 도출되었다. 1층은 도미토리 형태의 게스트하우스, 2층은 와인바 겸 북카페, 3층은 펜션. 새로 정한 이름은 ‘사이’였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라는 뜻도 되고,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3도와 5산의 사이라는 뜻도 된다. 3도란 형제도 마라도 가파도를 뜻하고, 5산이란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단산 군산을 뜻한다.

창밖과 심산스쿨은 주변에서 나뒹굴고 있는 책들을 그러모아 사이로 보내기 시작했다. 현재 사이의 서가를 채우고 있는 책들은 그런 식으로 모아진 것이다. 사이는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평생무료숙박권을 주겠다고 했다. 너무 과도한 제안이었다. 우리는 연간회원제라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 그나마 ‘말도 안되는’ 싼 가격이다. 어찌되었건 이런 식으로 인연의 실타래들이 얼키고 설키는 과정에서 사이는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사진작가 김진석과 함께 제주올레를 취재할 때 머문 곳도 여기였고, 서명숙 이사장을 위시한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와인파티를 벌인 곳도 여기였다.

[img2]

내가 제일 먼저 걸은 올레는 제10코스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사이에서 걸어나오면 그곳이 바로 제10코스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와인반 친구들이 우루루 내려와 있었다. 주말을 이용하여 내 딸도 내려와 있었다. 그들과 함께 걸은 제10코스는 더 없이 활기찼고, 가족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화순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퇴적암 지대를 거쳐 사구언덕에 다달았을 때 우리는 이미 깨달았다. 정말 아름다운 길이로구나! 산방산 밑 해안길을 걸을 때 뒤늦게 도착한 일행들이 맨발로 달려와 합류했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나에게는 감사를 표해야할 대상이 필요했다.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질문은 추상적이되 답변은 간결했다. 바로 제주올레 그 자체다.

잠시 딴 생각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풀려버리는 것이 인연이다. 자칫하면 악연으로 마무리되는 수도 있다. 누군가와 만나 인연을 맺게 되고, 그 인연이 아름답게 풀려 행복한 순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얼마나 감사해야 마땅할 일인가. 서명숙과 산티아고의 인연이 그러하고, 제주와 올레의 인연이 그러하고, 심산스쿨과 사이의 인연이 그러하다. 저만치 앞서 몸짓도 발랄하게 걸어가고 있는 딸과의 인연이 그러하고, 함께 와인을 홀짝거리며 이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과의 인연이 그러하다. 이 모든 인연들을 아름답게 꽃피워준 제주올레에 감사할 따름이다.

제주올레 제10코스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영물(靈物)은 산방산이다. 제10코스뿐만이 아니다. 제주 남서해안의 어디에서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랜드마크가 산방산이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영험한 느낌이 확연하다. 산방굴사가 자리잡고 있는 남면의 바위 기둥들은 암벽등반가의 피를 끓게 한다. 하지만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관계 기관에 문의해봤더니 암벽등반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산방산의 기운이 한 풀 꺾였다가 용머리 해안으로 다시 치솟기 시작하는 곳에 하멜기념관이 있다. 내게 깊은 감명을 준 주경철 교수의 역저 [대항해시대](서울대학교출판부)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풍랑으로 인한 표류(1653) 이후 맺어진 하멜과 제주의 인연 또한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설큼바당과 사계포구를 지나 해안도로를 걷다보면 사계화석발견지에 가닿게 된다.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약 1억 5천만년 전에 만들어진 화석이니 참으로 아마득한 인연이다. 2005년과 2007년에는 이 화석들을 주제로 하여 제주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것을 계기로 새로 만들어진 학문 분야가 바로 ‘인류생흔학(Homind Ichnology)'이다. 1억 5천만년 전에 만들어진 인연이 제주에서 신학문을 태동하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가연(佳緣)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주와 더불어 우리 모두 자랑스러워해야할 인연이다.

송악산은 우리 국토 최남단에 위치한 산이다. 오르기는 쉬운데 풍광은 장쾌하니 즐겨 찾게 된다. 송악산 정상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마라도와 가파도가 코 앞이다. 국토 최남단의 섬이니 그야말로 여기가 ‘땅끝’인 셈이다. 이쯤에서 한잔 안할 도리가 없다. 모두들 둘러 앉아 각자 준비해온 컵에 와인을 양껏 따른다. 국토 최남단의 산과 섬에게 건배, 우리를 함께 하게 해준 아름다운 인연에 건배,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어준 제주올레에 건배. 다시 발길을 틀어 말 방목장 언덕을 걸어 내려가며 생각한다. 오래 전에 어떤 시인이 노래했다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이렇게 노래하련다. 사람들 사이에 길이 있다. 그 길을 걷고 싶다. 그 길이 인연이다. 그 길이 제주올레다.

[img3]

[제민일보] 2009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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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12.24 17:19
*.12.65.186
올 한해도 심산스쿨을 통하여 여러분과 맺게 된 인연 덕분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인연 이어나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벌써 성탄 전야네요...저야 뭐 예수 생일과는 무관한 사람이지만 ㅋ
그래도 연휴 전야의 즐거움 같은 것을 살짝 느껴봅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성탄 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김진석

2009.12.24 18:43
*.12.40.230
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심산스쿨 모든 분들도 복 많이 받으세요.

최준석

2009.12.24 18:32
*.152.24.74
심산스쿨 구성원 모두 메리크리스마스..^^

차영훈

2009.12.24 19:04
*.71.88.66
메리 크리스마스!!

김형기

2009.12.24 19:51
*.29.192.245
폭탄 맞은 도시에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지고 마구 떼로 몰려 다니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 ㅋ (아, 그러고 보니 약간 서글픈 생각이 -.-) 어쨌거나 심산스쿨과 인연이 있는 모든 분들 즐거운 성탄 맞으시고 해피 뉴 이어 하시길......

새해엔 무조건 복 많이 받을 거에요....화이팅! ^^
profile

심산

2009.12.25 00:09
*.110.20.12
영님아, 제주 올레 한 바퀴 도는데 곗돈...까지도 필요없어 ㅋ
가기 전에 이야기해, 사이에 미리 이야기해놓을께...^^

최상식

2009.12.27 22:57
*.202.182.91
산방굴사에 입장료 내기 싫어서 가로등이 비친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밤에 가곤하는데
그 풍경도 참 \조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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