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1-09 11:38:20 IP ADRESS: *.16.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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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늬들 말이 다 옳아!  

      한량은 오래 전부터 나의 장래희망이었다. 그리고 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한량이 되었다. 한량에게 출퇴근을 강요하는 직장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직장이 없다고 해서 직업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일견 백수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치열한 직업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자가 한량이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 내 일도 없지만 내 일 아닌 것도 없다. 모든 한량 혹은 백수들이 우스개소리로 늘어놓는 신세타령이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꼭 한탄할 신세만도 아니다. 누군가가 이런 독특한 지위(?)를 약점 삼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귀찮게 굴지만 않는다면.  

 며칠 전의 일이다. 세수하기도 귀찮아 대충 벙거지를 눌러쓰고 집 앞의 밥집으로 들어서다가 대학시절 후배와 마주쳤다. 녀석은 다짜고짜 개혁정당의 필요성을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파한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형도 당장 입당할 거지? 당사도 여기서 가깝다구!”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사래가 들릴 뻔했다. 나는 진심으로 녀석이 긴요하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에게 긴요한 것이 나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최근 몇 달 동안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넌 왜 촛불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거야? 넌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아?” 난 물론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애도한다. 소파 역시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촛불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진영의 표를 결집하는 거야, 누가 당선되고 안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구!” 나는 물론 진보진영이 결속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던졌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뜻에서 정치적 신념에 대한 토론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그것과도 같다. 이를테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논쟁과도 같다는 뜻이다. 어느 일방이 상대방을 자기 식대로 설득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느니 차라리 산에 오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동네라고 해서 세속의 밖에 위치해 있는 건 아니다. “넌 왜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건설에 반대하여 맞서 싸우지 않는 거야? 네가 진정 산악인이라면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문제만큼은 앞장 서서 싸워야 할 것 아니야!” 물론 나는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의 건설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대중 앞에서 삭발을 하고 농성장에서 단식에 돌입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엔 언제나 옳은 의견들이 차고 넘친다. 게다가 그들 각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모두 다 하나같이 옳을 뿐더러 한시가 급하게 처리되어야할 문제들뿐이다. 그들 각자에 따르면 개혁정당은 당장 건설되어야 하고, 주한미군은 당장 철수해야 하며,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건설은 당장 중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보다 옳고 무엇이 보다 급하냐고? 설마 나 같은 한량에게서 모범답안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항상 옳으니 모두들 나를 따르라!” 당당하게 대열의 앞으로 뛰쳐나와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혁명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혁명가와 가장 멀리 떨어져 그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인간유형이 바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한량이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애원한다. “나는 항상 그르니 제발 아무도 나한테 뭣 좀 물어보지 말아줘!”  

 혁명가는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한량에게는 저 혼자 행복해지는 일도 버겁기만 하다. 혁명가는 지금 당장 자신을 따라야만 좋은 세상이 온다고 외친다. 한량은 그냥 내게서 신경을 끄고 냅두라고 부탁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혁명가는 언제나 옳다. 하지만 나는 진단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혁명가들만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고. 내친 김에 나는 헛소리까지 한다. 차라리 한량들이 더 많았더라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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