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06 19:29:58 IP ADRESS: *.241.4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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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영화의 기품있는 클래식
휴 허드슨의 [불의 전차](1981)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키이스 캠퍼스에는 신입생들에게 부과되는 전통적인 통과의례가 있다. 교정 시계탑의 종이 정오를 맞아 12번을 울리는 동안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아오는 달리기 시합이다. 언뜻 보기에는 유쾌한 놀이처럼 보이지만 무려 700년 동안이나 불가능했던 이 기록을 최초로 달성한 사람은 1919년 신입생이었던 해롤드 에이브러햄(벤 크로스)이었다. 그가 청춘을 다 바쳐 그토록 미친 듯이 달렸던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심오하다. 바로 영국 상류층 사이에 팽배해 있던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편견을 극복하고 싶다는 것.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불리던 에릭 리들(이안 찰슨)은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번민한다. 선교사의 길과 육상선수의 길이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육상을 통한 선교의 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통해 그의 사랑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휴 허드슨의 극영화 데뷔작 [불의 전차](1981)는 영국의 국가대표 육상선수로서 1924년 제 8회 파리올림픽에 참가했던 이 두 남자의 삶과 달리기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원제로 쓰인 ‘불의 전차’란 본래 윌리엄 브레이크가 영국 성공회의 성가 [예루살렘]을 위해 작사했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1978년 해롤드의 장례미사에서 장중한 합창곡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오프닝은 반젤리스의 장엄한 신서사이저 음악이 연주되면서 일군의 젊은이들이 맨발로 해변을 질주하는 장면이다. 그들 각자가 달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되, 달린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환희를 찬양하는 듯하다. 이 유명한 오프닝은 엔딩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며 이 영화에 독특한 품격을 부여한다.

[불의 전차]는 스포츠 영화의 클래식이다. 현대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느리고 우아한 사실주의를 사랑한다. 완벽하게 재현된 1920년대의 소품과 의상 그리고 생활풍속도들도 멋진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아카데미 역시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의상상 등으로 이 영화에 경의를 표했다.

[한겨레] 2004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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