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5-28 00:37:50 IP ADRESS: *.146.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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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투선수의 인생극장

마틴 스코시즈 [분노의 주먹](1980) 

 

사각의 링 이외의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조명은 가운에 붙은 두건 아래로 짙은 음영을 드러낸다. 두건 아래로 눈을 흡뜬 사나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허공으로 두 주먹을 내뻗는 사나이의 동작은 흡사 무언극 같기도 하고 발레 같기도 하다. 흑백화면과 고속촬영이 가장 멋진 앙상블을 이루어 영화사상 최고의 오프닝들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분노의 주먹(1980)]의 첫 장면이다.

권투장면을 스크린에 담고자 할 때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처럼 느껴지는 영화가 바로 [분노의 주먹]이다. [태양은 없다]를 만들 때의 우리도 그랬다. 앵글을 어떻게 잡든 필름속도를 어떻게 변주하든 모두 다 이 영화의 아류처럼만 느껴질 뿐이었다. 마이클 채프먼의 촬영은 그만큼 완벽했다.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찢겨질 때마다 핏방울과 땀방울이 화면 밖으로 튕겨져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마틴 스코시즈는 단순한 스포츠영화에 안주할 감독이 아니다. 대부분의 권투영화는 주인공이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끝난다. 그 과정에서 생생한 권투장면을 보여줬다면 일단 합격선은 넘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분노의 주먹]에서 그것은 출발선에 불과하다. 이 작품 속의 권투장면은 최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성난 황소'라 불리우던 제이크 라모타가 세계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여기까지는 영화 속의 한 시퀀스에 불과하다. 스코시즈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분노의 주먹]은 이 영화의 원작자이며 실제 권투선수이기도 한 제이크 라모타라는 캐릭터를 끈질기게 파고든다. 관객은 그의 재능과 패기 그리고 탐욕과 어리석음을 날 것 그대로 들여다보는 희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빈 일종의 인간 극장이다. 스코시즈는 한 문제적 권투선수의 흥망성쇠를 증언하면서 그 배후를 이루고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향하여 '분노의 주먹'을 마음껏 날린다. 이 패기만만한 작가적 야심은 한 천재배우와의 만남을 통해 완벽하게 구현된다. 이 작품 속에서 무려 23Kg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20년의 세월을 소화해낸 로버트 드 니로에게는 어떠한 찬사도 아깝지 않다.

[한겨레] 2003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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