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01 14:01:23 IP ADRESS: *.147.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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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박한 공기 속으로

  로버트 마르코비치 [인투 씬 에어](1997)

2004년 5월18일,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등반대장 박무택과 대원 장민은 세계의 지붕 끝에 우뚝 섰다. 대구 계명대학교 산악부 출신들이 모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고자 성취해낸 쾌거였다. 하지만 이날 오후 이들은 무전기를 통하여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탈진과 설맹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다는 것이다. 셸파들마저 포기한 상황에서 홀로 그들을 구조하러 올라간 백준호 대원마저 실종되어 버렸다. 도대체 하늘과 맞닿은 저 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해발 8천미터에 오르면 공기 중의 산소 농도가 평지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 ‘희박한 공기’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극한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마련이다. 산악인들은 그래서 이 특수한 시공간을 ‘죽음의 지대’라고 부른다. 이곳은 곧잘 인간의 의지와 이성의 통제를 무력화시키곤 한다. 산악문학으로는 드물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바로 이 죽음의 지대에서 펼쳐지는 비극적인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으로 유명하다.

1996년 5월 10일, 에베레스트 죽음의 지대에서는 무려 18명이 조난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사고 당일 정상에 올랐던 산악인 겸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증언하는 그들의 최후는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버거울 만큼 고통스럽다. 동시에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기적처럼 피어나는 뜨거운 인간애의 편린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지만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던 이 책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추구해야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디브이디(DVD)로 출시되어 있는 로버트 마르코비치 감독의 [인투 씬 에어](1997년)는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다. 할리우드식 산악영화들 속에는 결핍되어 있는 ‘고통스럽지만 우직한 진실’이 이 작품 속에는 있다. 박대장의 조난소식을 듣고 한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불현듯 이 작품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홀린 듯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떠나가 버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 산악인 박무택 백준호 장민! 부디 편히 눈을 감고 극락왕생하시라!

[한겨레] 2004년 5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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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6.01 14:21
*.147.6.178
이 글을 쓰고 난 뒤 꼭 1년 후에 저는 박무택을 찾아 에베레스트로 떠났었답니다...^^

백소영

2006.06.01 16:04
*.44.147.215
조난당한 사람을 찾는 일은 산을 타는 일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무사히 돌아 오셔서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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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6.11 21:30
*.147.6.178
별로 무사하지는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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