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1-05 23:38:52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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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세이]가 2007년에 창간 20주년을 맞아 새롭게 만든 꼭지가 '어느 중독자의 고백'이다. 그런데 날더러 그 첫번째 글을 써달란다. 쳇, 내가 무슨...중독자들의 대표선수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애니웨이, 나는 작가다. 게다가 '솔저 오브 포춘'이다. 돈 주고 쓰라면 쓴다. 산에 대해서 쓸까 와인에 대해서 쓸까 잠깐 고민하다가 와인을 위주로 두 개를 합쳐버렸다....^^

[img1]

산 아래 와인

내가 산병(山病)이 깊이 든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제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덕분에 바윗길에서 쉬다가도 생면부지의 클라이머들로부터 물을 얻어먹기도 하고, 멀리 외국의 독자들로부터도 반가운 인사말과 복잡한 질문이 담긴 메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산 못지 않게 와인에도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은 별반 알려져 있지 않다. 덕분에 심산스쿨에 와인반을 개설하고 내가 직접 강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뜬금없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저 친구가 이제 완전히 맛이 갔구만? 와인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남들을 가르치려 드는 거야?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듯 하다.

본래 나는 와인반을 만들고, 최고의 강사를 모셔 와서, 내가 그 수강생이 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접촉했던 와인강사들은 대부분 손사래를 치며 고사했다. 처음 나는 그들의 반응에 의아해하고 원망도 했지만 이제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한다. 그 복잡다단한 저간의 사정들을 모두 밝히기에는 내게 주어진 지면들이 너무도 작다. 어찌되었건 그래서 나는 ‘배우면서 가르치자’라는 해괴한 해법을 찾아냈고, 그 결과 존경하는 김준철 선생님이 원장으로 계시는 서울와인스쿨에서 소믈리에 코스와 마스터 코스를 모두 수료했다. 나의 최종학력(?)이 ‘코오롱등산학교’에서 ‘서울와인스쿨’로 바뀌는 순간이다.

내가 만든 와인반은 그 지향점이 단순명쾌하다. 와인을 제대로 알고 멋지게 즐기자. 그게 전부다. 달리 표현하자면 소믈리에나 와인숍 주인 등 직업적인 전문인력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모여 와인을 공부하고 즐겁게 마시자는 것이다. 와인의 공동구매 역시 이 모임의 존재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와인을 구입할 때는 세트 단위로 12병씩 사들이는 것이 가장 싸다. 하지만 제 아무리 멋진 와인이라도 같은 것을 12병씩이나 마셔야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와인들을 한 모금씩만 맛보기에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짧다. 그렇다면? 세트 단위로 사들여 빨리 그것들을 마시고 또 다른 와인들을 맛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마실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와인반이다. 자격증을 따거나 교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와인반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 와인반 때문에 와인을 더 마신다. 매주 열 병 이상의 와인들을 마시고, 일일이 그 기록들을 남기며, 교과서를 뒤적여 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행복한 중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누군가 말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 와인 역시 그렇다. 나는 이렇게도 말한다. “무언가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수강생일 때는 한 귀로 흘려듣던 이야기도 내가 직접 그것에 대하여 가르치려 하니 죽어라고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새록새록 알게 되는 심오한 와인의 세계가 더 없이 사랑스러울 뿐이다.

중독이 깊어지면 어느 경지에 오른다. 그곳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 산과 와인은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산 아래 와인’이다. 프랑스의 사부아와 쥐라,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아르헨티나의 멘도자 등이 모두 산자락 아래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는 동네들이다. 이즈음의 나는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내가 오르고 싶은 산과 그 아래의 와인 마을들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곳에 가서 산에 오르고, 와인을 맛보고, 글을 쓴다면,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하는 일들만으로 멋지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되는 셈이다. 그것이 산과 와인에 중독된 작가(!)가 이번 삶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월간 에세이]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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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범

2007.01.06 10:19
*.235.170.238
오늘 와인셀러에 올라온 와인들을 마시며 번개를 했습니다.
쉬라즈. 소비뇽 블랑. 까르비네 소비뇽.
모두 이 와인에 대해 아하! 하면서 마시더라구여.
멋졌습니당!!! 주욱!!!! 멋진 와인 팍팍 소개해 주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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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1.06 10:24
*.235.170.238
흠, 상범, 어제 김대우반 번개 멋졌어!
이런 추세로 계속 나가면 상범도 제2기 와인반에 합류하게 될 테니
그 전에 예습 삼아 많이 마셔둬...^^

홍주현

2007.01.06 10:31
*.73.43.160
저도 얼마전에 블루넌을 한병 사다가 마셨더랬죠. ㅋㅋㅋ 저도 와인셀러에 올라온 와인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마셔볼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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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1.08 18:11
*.51.161.36
[월간 에세이]측에서 방금 전화를 해와서 원고의 부분 수정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편집 방향과 약간 안맞는단다
그래서 내가 그냥 싣지 말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고쳐 쓸 시간이 없고...솔직히 말해서 고쳐쓸 필요를 전혀 못 느끼니까!^^

아아 지난 번 [작은숲]과도 그러고 [월간 에세이]하고도 이러고...
이러다가 아무래도 '악성 필자'로 낙인 찍힐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만약 그렇게 된다면...나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원고청탁을 받고 쓰는 일...싫다
독자적인 글을 써서 독자적인 지면(?)에 발표하든가
아예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게 제일 적성에 맞는다

그러므로 윗글의 출처도 [월간 에세이]가 아니라 [심산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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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7.01.09 20:17
*.86.217.161
단행본으로 출간하셔요.....
지들만 손해지, 뭐.

심정욱

2007.01.10 16:21
*.216.70.254
우연히 들려, 읽다가...그만 1번부터 17번까지 다 읽게되었네요. ㅋ
앞으로도 쭈~욱 기대합니다.

그리고 스쿨에 작년에 들여놓으신 와인셀러도....직접 구경해보고싶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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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1.10 18:00
*.235.170.238
하이, 정욱!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
자주 놀러와서 글도 남기고 그래라...^^

최정덕

2007.01.30 00:27
*.18.167.222
재밌게 읽고 갑니다~ 심산샘~ 심산샘~ 이러다 옹달샘 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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