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04-24 18:30:38 IP ADRESS: *.201.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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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심산의 와인예찬]은 저의 야심적인(?) 와인 관련 에세이 연재물의 큰 제목(!)입니다. 2007년 한 해 동안은 주간 [MOVIEWEEK]에 연재하였고, 2008년부터는 월간 [ARENA]에 연재하였는데, 월간지에 연재하면서부터 게으름을 피우다가 결국엔 흐지부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사정에는 칸첸중가 트레킹이 커다란 기여(?)를 했지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한다? 저는 [심산스쿨] 홈페이지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즉 원고 청탁 없이 스스로 원고를 쓰겠다는 야멸찬(!) 결심을 한 거지요.

 

그런데 작가라면 누구나 다 아는 쓰라린 진실(?)이 있습니다. “마감이 있어야 글을 쓴다.” 원고 마감이 코 앞에 닥쳐서 누군가가 들들 볶아대야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하는 노예근성(^^)이지요. 그래서...더 이상은 글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며칠 전에 새로운 연재 지면이 나타났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중앙SUNDAY]라는 일요신문입니다. 덕분에...다시 [심산의 와인예찬]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연재는 아마도 4월 27일자에 실릴 듯한데, 그 연재의 제목은 [심산의 영화 속 와인]입니다. 하지만...이곳 [심산스쿨] 홈페이지에 올릴 때는 여지껏의 연재 순서에 따라 [심산의 와인예찬(30)]이 됩니다. 어찌되었건...[중앙SUNDAY] 덕분에 앞으로는 매주 영화와 와인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부지런해질 수 밖에 없겠네요(ㅋㅋㅋ). 자, 그럼 오랜만에 연재가 속개되는 [심산의 와인예찬]을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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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되 치명적인 합환주


심산의 와인예찬(30) [베오울프](로버트 저메키스, 2007) 속의 벌꿀와인 미드(Mead)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베오울프](2007)는 찬반 혹은 호오가 극명하게 갈렸던 작품이다. 사전 지식 없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개 느닷없이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실사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3D 애니메이션이었고, 그 중에서도 ‘퍼포먼스 캡처’라는 최신 테크놀로지가 그야말로 눈부시게 구현된 작품이었다. 퍼포먼스 캡처의 핵심은 실제의 배우를 찍지 않고 그 움직임만을 캡처하여 3D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테크놀로지에 감탄하는 영화팬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덕분에 이런 저런 비난과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당연하다. “안젤리나 졸리의 전라씬을 보러간 거지 3D를 보러간 건 아니었다.” “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숨겼느냐?”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알고 아이들과 함께 보러갔는데 너무 선정적이고 잔혹해서 당황했다.” 반면 이 영화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본격 성인용 3D 애니메이션이 출현한 거다.” “아이맥스 3D 입체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봐라.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미래다.”

 

또 다른 불만은 영문학 전공자들에게서 터져나왔다. 아시다시피 [베오울프]는 북유럽 최고의 고대 영웅서사시이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등을 위시한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고대 영어로 기록한 덕에 영문학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들의 불만은 영화 [베오울프]가 위대한 영문학 서사시 [베오울프]를 ‘할리우드 입맛에 맞게 제멋대로 각색’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찬반양론을 살펴보자면 지면이 턱 없이 모자란다. 문학과 영화의 차이를 논하는 것도 너무 거대한 주제이다. 그렇다면 너 자신은 어떻게 보았느냐고? 나는 이 영화를 즐겼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감탄했고, 신화의 재해석이 흥미로왔으며, 무엇보다도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와인 때문에 즐거웠다.

 

와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베오울프] 속에 출현하는 와인을 인식하기 힘들다. 한글자막 번역에서 의도적으로 비껴갔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들여다보자. 용을 퇴치한 왕으로 추앙받는 호르트가르(앤소니 홉킨스)가 자신의 대연회장에서 흥청망청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왕의 충복인 언퍼스(존 말코비치)가 개차반으로 취한 채 절름발이 소년을 후려치면서 소리지른다. “술! 술을 가져오란 말이야!” 그 순간 갑자기 내 귀가 쫑긋했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의 영어실력은 형편없다. 기껏해야 “아임 파인, 쌩큐, 앤 유?” 따위의 초등학생 수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와인 관련 영어단어만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img3]

 

한글 자막에 ‘술’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 실제로 발음된 영어는 ‘미드(Mead)'였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대연회장’이라는 자막과 상응하는 영어 역시 ‘미드 홀(Mead Hall)'이다. 나는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틈에서 저 혼자 무릎을 쳤다. 아하, 저기가 북유럽이지! 쟤네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미드를 마셨었지! 미드에 대한 찬사는 이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괴물을 물리칠 불세출의 영웅인 베오울프(레이 윈스톤)가 바다를 건너 도착한 다음 호르트가르 왕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다. 베오울프는 호르트가르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들었소. 당신의 유명한 벌꿀술도 마시고 싶구료.”

 

북유럽의 미드가 그렇게도 유명한가? 유명하다. 그리고 북유럽 유일의 와인이다. 벌꿀로 와인을 만든다고? 그렇다. 이쯤에서 와인양조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되새겨보자. “당분이 발효되면 알콜과 탄산가스로 변한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포도로 만든 와인은 포도 속의 당분이 발효되어 알콜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유럽에서는 왜 포도가 아닌 벌꿀로 와인을 만드는가? 프랑스 루아르강 하구의 낭트와 수도인 파리를 잇는 선이 와인양조용 포도재배의 북방한계선이다. 이 한계선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에서는 와인양조용 포도가 자라지 못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독일만이 이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그들이 자랑하는 리슬링 화이트와인을 만들어낼 뿐이다. 덕분에 [베오울프]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북유럽에서는 포도로 와인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북유럽인들이 와인의 재료로 선택한 것이 바로 벌꿀이다. 사실 당분 함량만으로 따진다면 벌꿀을 넘어설만한 자연 재료는 없다. 그들은 벌꿀을 ‘발효’시켜 와인으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미드’다. 영어로는 ‘하니 와인(Honey Wine)’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는 북유럽의 미드 대신 캘리포니아의 하니 와인들이 몇 종류 들어와 있다. 미드는 달콤하다. 그러나 천박한 단맛이 아닌 그윽한 단맛이다. 북유럽에서는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거행한 뒤 한 달 동안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이 미드를 함께 마시면 부부 금슬도 좋아지고 평생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믿음이 있다. 신혼부부가 함께 그윽한 단맛의 벌꿀와인을 마시는 밤 혹은 한 달, 그것이 바로 하니문(Honey Moon)의 어원이기도 하다.

 

[베오울프] 속에서의 미드는 보다 심오한 차원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호르트가르 왕이 죽자 베오울프는 그가 남긴 ‘미드홀’과 ‘미드’를 독차지하며 세속의 지배자가 된다. 그는 악마를 물리친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영문학의 고전과 할리우드의 재해석이 부딪히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영화의 막바지에서야 밝혀지지만 베오울프는 악마를 처단하지 않았다. 괴물 그린델의 어머니이기도 한 ‘물의 여신’(안젤리나 졸리)과 대적하게 되었을 때 베오울프는 심한 동요를 겪는다. 전라의 그녀 육체가 너무도 고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베오울프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유혹한다. “내게 아들을 낳게 해줘. 그러면 네게 권력과 부와 미녀를 줄게.”

 

베오울프는 물의 여신의 유혹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녀와 정사를 나누고 악마의 아들을 낳는 것이다. 육욕과 권력욕의 참을 수 없는 표출이다. 당신은 베오울프에게 왜 위대한 영웅이 되는 대신 어리석은 인간이 되었느냐고 비난할 참인가? 나는 당신이 전라의 안젤리나 졸리를 앞에 두고서도 그렇게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비난을 내뱉을 수 있을지 조금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윽한 단맛으로 영혼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들끓게 하는 미드를 몇 잔 마신 다음인데도? 당신에게 북유럽의 벌꿀와인 미드를 함께 나누어마실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축복 받을 일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된다. 그것은 달콤하되 치명적인 와인이다.

 

[중앙SUNDAY] 2008년 4월 27일

[img4]

홍나래

2008.04.24 20:37
*.103.153.183
'그윽한 단맛'...ㅋ 침이 고입니다...

조현옥

2008.04.24 23:03
*.53.218.59
헉! 저는 '벌꿀술'이 전설이나 신화, 혹은 고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만 자주 등장하길래,
가상의 술인줄 알았어유~~ㅡ_ㅡ (이런 무식이! 퍼벅!)
게다가 허니문의 기원이었다니... ㅡ_ㅡ (아주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녀석아!)

현실의 술인 걸 안 이상, 꼭 마셔보고야 만다! 아자!
profile

심산

2008.04.25 03:30
*.131.158.25
옥아, 너 같은 알라가 미드 마셨다가는...뭔 사고를 칠지 모른다...ㅠㅠ....부디 조심해라...^^

최상식

2008.04.25 10:35
*.72.64.25
ㅋㅋㅋㅋㅋ

김주영

2008.04.28 12:40
*.121.66.212
달콤하되 치명적이라...
아~치명적이고잡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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