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8-02 00:07:28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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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
심산의 와인예찬(20) 하늘마루집의 오브리옹(하)

오브리옹을 처음 만난 곳은 인사동의 한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당시의 나는 김시인이니 이화백이니 박작가니 하는 따위의 이른바 인사동식 예술가들에게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중이어서 술만 마셨다하면 위악적인 독설을 내뱉곤 했다. 그날도 무슨 말도 안되는 논쟁 끝에 저 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술자리를 함께 했던 초면의 그녀가 나를 배웅해주려 따라나왔던 모양이다. 집이 어디에요? 이렇게 취해서 혼자 택시 타고 갈 수 있겠어요? 나는 길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횡설수설 떠들어댔던 것 같다. 집? 나 그런 거 없어. 나랑 한잔 더 하든가, 아니면 나 좀 재워줘, 당신 집에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곳에 누워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였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처음 만난 여자의 집에서 술냄새를 푹푹 풍기며 불현듯 깨어나곤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랜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벗어던진 속옷이며 헝클어진 침대 따위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어젯밤에 그녀와 사랑을 나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루에는 정갈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짤막한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대학 강의 때문에 먼저 나가요. 식사하고 가세요. 하지만 나는 그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루에 유럽풍의 아주 근사한 양주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위스키며 브랜디 따위가 내 발목을 틀어쥐었던 것이다.

나는 밥상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위스키부터 한 병 땄다. 냉장고를 뒤져 얼음을 찾아낸 다음 위스키 온 더 락을 만들어 짤랑거리며 천천히 오브리옹의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직 소설가답게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의 컬렉션이 제법 훌륭했다. 어느 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석양의 붉은 빛이 그 집의 벽면에 고즈넉한 아지랑이를 제멋대로 그려 넣고 있을 즈음, 나는 저 홀로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우고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밤이 되어 돌아온 오브리옹은 그때까지 나가기는 커녕 여전히 팬티 차림으로 온 집안을 어질러 놓은 채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너무도 어이없어 했다. 나는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혀가 꼬인채 그렇게 물었다고 한다. 우리 어젯밤에 사랑했었어? 오브리옹은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내게 되물었다. 사랑? 혹시 섹스를 말하는 거야? 나는 킬킬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그거지 뭐, 메이킹 러브.

나는 그 집에서 내리 사흘 동안 술을 마셨다. 위스키 대 여섯 병을 비워내는 동안 몇 번의 사랑을 나눴던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술을 마시는 동안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졌다. 너 그렇게 술 마시다 죽어. 오브리옹이 자못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렸다. 나는 잔뜩 허장성세를 부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이게 어디에 나오는 대사인지 알아? 아주 어렸을 때 신성일 나오는 어떤 영화에서 나온 대사야. 아마도 이만희 감독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제목은 기억이 안 나. 오브리옹은 그 와중에도 내게 무언가를 먹이려 죽도 끓여주고 전골도 만들어줬다. 나는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고는 다시 새로운 위스키의 병뚜껑을 돌렸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행복과 슬픔이 서로를 구분해낼 수 없을 만큼 마블링처럼 뒤섞인 풍경들이다.

[img2]

오브리옹과의 관계는 거의 일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오브리옹과 나는 서로를 사랑했던 것일까. 사랑이 메이킹 러브의 한글식 표현이라면 물론 그랬다. 하지만 사랑이 그 이상의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답변은 쉽지 않다. 당시의 나는 형이상학 자체를 부인하거나 경멸했었으니까. 나는 오브리옹의 모든 위스키를 마시고, 그녀에게서 용돈을 타 썼으며, 다른 여자들과의 숱한 밤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줬다. 오브리옹은 나와의 나날들에서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 알 수 없다. 한 번은 그녀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렇게 살면 마음이 편해? 나는 별 걸 다 묻는다는 식으로 킬킬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난 마음이 없어, 하트리스(Heartless).

오브리옹과의 마지막 밤은 또렷이 기억난다. 유리로 된 천장을 통하여 밤하늘이 올려다보이는 오브리옹집의 하늘마루에서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 직후인지라 밤하늘이 너무도 맑아 별이 몇 개 떠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저 홀로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자 오브리옹이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넌 나보다도 이 집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뻔뻔스러운 나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응, 사실 그래. 오브리옹은 자신이 마시던 와인잔에 코를 들이박고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와인의 향기를 들이마시더니 눈을 내리깐 채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이 집에서 살면 안 돼?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말고. 이 집을 아예 네 명의로 해줄게, 나와 결혼해준다면 말이야.

갑자기 가슴이 묵지근해졌다. 그녀는 지금 진심으로 내게 청혼하고 있는 중이다. 가타부타에 대한 판단에 앞서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처럼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살아가고 있는 녀석에게 진심 어린 청혼이라니!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끝에 기껏 내보인 리액션이라는 것이 참으로 뜬금없었다. 그건 어떤 술이야? 오브리옹은 자신의 와인잔을 내게 내밀었다. 그 잔에 담겨 있던 술이 바로 샤또 오브리옹(Chateau Haut-Brion)이었다. 현재의 나였다면 일단 그 명성 앞에 무릎부터 꿇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당시의 내 혀는 위스키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었고, 다른 존재형태의 술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브리옹을 한 잔 맛보고는 민망하게 피식 웃으며 잔을 되돌려줬다. 이건 너무 밍밍하네, 내 과(科)가 아닌 거 같애.

그리고 우리는 그날 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남은 위스키를 다 마셨고, 그녀 역시 천천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브리옹을 다 마셨다. 별빛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오브리옹이 자신의 서랍을 뒤져서 작은 양초를 하나 내왔다. 그녀는 더 이상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와인잔에 든 오브리옹을 기울여 양초의 불빛에 비춰보면서 조용히 그 술을 음미했을 뿐이다. 그녀는 그날 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음 따위는 갖고 싶지도 않았던 내가 그녀의 속마음을 넘겨짚어 볼 자격은 없다. 다만 그날 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더 이상 이 하늘마루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실 수는 없겠군. 나는 고개를 숙인채 오브리옹을 음미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건네다 보았다. 팔을 뻗으면 바투 닿을만한 거리였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만큼 아마득한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img3]

그날 이후로 나는 오브리옹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내게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따금 그녀는 장편소설이며 소설집 따위를 발표했는데 나는 그 작품들 속에서 내가 변형된 캐릭터들을 찾아내고는 가슴 시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와인에 빠지게 되었고, 이제는 오브리옹이 얼마나 위대한 와인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세월을 되돌려 다시금 그녀의 와인을 맛보고 또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무어라 말할 것인가? 어리석은 가정이다. 한번 지나간 것은 영원히 지나간 것이다. 누구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그 세월이 남긴 마음의 무늬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수 있을 뿐이다.

오브리옹은 내 마음에 그렇게 남았다. 그것은 세속의 갖은 평가와 번잡한 스캔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절대고독의 와인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하여 오브리옹의 코르크를 따던 날, 내 눈 앞에는 내가 보냈던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이 그야말로 뒤죽박죽의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파노라마 앞에서는 문득 할 말을 잊는다. 방탕과 회한, 허무와 반항, 도취와 위악의 세월 저 너머에서 자신만의 향기를 오롯이 지키며 저 홀로 익어가던 위대한 와인. 내게 있어 오브리옹은 지상에서 천상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뚫어놓은 하늘마루의 유리천장과도 같은 와인이다.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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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8.02 00:11
*.235.170.238
그런데 은, 이번 일러스트는 영 감이 잘 안 잡히네?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이 작중인물인 '나'인가 아니면 '오브리옹'인가?
저게 어떤 장면일까...?

강상균

2007.08.02 10:34
*.100.92.60
절대고독 같은데요.

정경화

2007.08.02 11:03
*.96.222.1
저 일러스트는 오브리옹을 그린듯 하옵니다.
샘님의 사랑을 갖지 못한 외로움을 안고 쓰러져있는 오부리옹..이 아닐까요??ㅋㅎ
아.. 저는 언제 오브리옹을 한번 들이켜 볼까요??..
오부리옹..... 뜨악.

김희자

2007.08.02 11:19
*.134.45.100
내 과가 아니것같아.. 오. 쿨한 거절. 역시 선생님..

조현옥

2007.08.02 12:32
*.62.89.4
제 생각엔 오브리옹은 자신의 고독을 버릴 생각이 없었던 듯 보이네요.
선생님이라면 자신의 고독을 침해하지 않고 내 버려둔 채,
세상의 '독신'을 방해하는 이목에선 구해줄 꺼라고 믿었을지도...

민다혜

2007.08.02 13:22
*.243.40.71
와인보다 어째.. 와인예찬글 속에 나오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에 더 시선집중이 되는 걸까효;;; 와인의 멋을 몰라서 인가;;; 조현옥님 말씀이 멋지게 다가오네요^^

한수련

2007.08.02 15:02
*.251.63.57
나도 선생님 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하지만 정말 하트리스가 되기란 범인에겐 너무나 어려운일...
그러나 진짜 하트리스가 되어보지 않고 늙는다면 불행할것 같다는 생각이...
매일 그렇게 나는 아슬아슬...
지금 내겐 선생님이 살아온 삶이 제일 부러운 것 같아요.
profile

심산

2007.08.02 15:22
*.201.16.63
얘들아, '선생님'이라는 캐릭터는 저 글 안에 없어
그냥 '나'라는 혹은 '오브리옹'이라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라니깐!^^
profile

명로진

2007.08.03 10:50
*.129.236.216
심샘이 저기 누워있는 사람처럼 곱상하진 않잖아요?
profile

심산

2007.08.03 21:44
*.241.45.203
로진, 에세이 속의 '나'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조현옥

2007.08.04 04:42
*.62.89.4
흠....
profile

명로진

2007.08.04 13:38
*.129.236.247
오호....맞다. 와인예찬은 에세이식 소설 혹은 소설식 에세이니까.
아, 난 왜 자꾸 현실이랑 연결이 되지? ㅋㅋㅋ

이소영72

2007.08.21 17:53
*.186.212.4
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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