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7-19 01:36:23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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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장미의 나날들
심산의 와인예찬(19) 하늘마루집의 오브리옹(상)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Days of Wine and Roses)](1962)는 아주 오래 전에 TV에서 본 흑백영화의 제목이다. 잭 레몬과 리 레믹이 나왔던 우울한 멜로영화였는데, 알콜중독자들의 내면과 외향에 대한 섬세한 디테일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이후 다른 뜻으로 전이되어 사용된다. 제목 속의 와인은 술의 총칭이고 장미는 물론 여자를 뜻한다. 덕분에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이란 ‘취생몽사’ 혹은 ‘방탕한 삶’에 대한 우회적 레토릭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술과 여자에 빠져 제멋대로 살아버린 나날들. 그렇게 ‘막 살아버린’ 날들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위험한, 뼛속 깊이 비관적인, 그러나 겉으로는 한없이 가벼운, 방탕하기 그지없는. 영어에는 이에 해당하는 멋진 표현이 있다. “Days of Being Wild.” 이는 곧 [아비정전](1991)의 영어판 제목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이 시작된 것은 우연히도 [아비정전]이 개봉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비(장국영)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덕분에 [아비정전]은 한 동안 ‘내 인생의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혔었다.

서른살 즈음이었다. 십대 때는 나도 서른살이 되기 전에 죽어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십대 중반을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서른살’이란 너무도 낯설고 먼 것이어서 내가 서른살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누구나 갑자기 서른살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른살이 되어버리면 너무도 끔찍할 것만 같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들이 벌어진 것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는 서른살이 되던 날 아침, 갑자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 낯선 평화는 일종의 해방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img2]

듣기 좋게 표현해보자. 나는 서른살이 되자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무슨 혁명가쯤으로 여겼다. 역사는 진보하거나 진보해야만 된다고 믿었고, 나 자신이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데 기꺼이 헌신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세상에는 의미 혹은 진리 같은 것이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을 찾아내고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른살이 되던 날 아침,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한 인생관 혹은 세계관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삶의 방식과는 너무도 걸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위악적으로 표현해볼 수도 있다. 서른살 이전의 나는 사랑의 운명적이고 필연적이며 영속적인 ‘일대일 대응’을 믿었다. 덕분에 나의 이십대 시절이란 만나는 여자마다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달라고 조르다가, 결국에는 버림 받고 술을 퍼마시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서른살을 통과할 즈음 그러한 믿음이 소멸되어 버렸다. 그것이 반복되는 실연의 결과였는지 세계관 자체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제 사랑의 운명이니 필연이니 영원이니 하는 따위의 로맨틱한 레토릭들을 ‘일종의 농담’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표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위선적으로 표현했다 해서 본질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위악적으로 표현했다 해서 그것이 추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당시 서른살을 통과할 즈음의 나는 어떤 믿음의 총체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 믿음을 신념(faith)이라 표현해도 좋고 충성심(loyalty)이라 표현해도 좋다. 역사와 정의에 대한 믿음이건 사랑의 일대일 대응에 대한 믿음이건 마찬가지다. 크게 보아 한 통속인 것들로서, 믿음의 총체를 구성하고 있는 일개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시절을 지탱해온 믿음의 상실은 곧바로 불행한 삶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뜻에서 그것은 일종의 해방이기도 하다. 더 불행한지 행복한지는 측량할 방법이 없으나 어찌되었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른바 ‘작가’가 된 것이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 대신 재미를 좇는 사람(fun-seeker)이 되었다. 청년시절 내내 애써 외면했던 암벽등반을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어떤 이는 1990년대 초반이 바로 구소련제국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시작된 시기라는 점을 들어서 이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기도 한다. 그들의 설명이 제법 그럴 듯한지의 여부에 대하여 나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다. 이미 그들과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버린 까닭이다.

내 삶에서 ‘와인과 장미의 나날들’이 시작된 것은 이 즈음이다. 삼십대 초반의 몇 년 동안 나는 더 할 수 없이 방탕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어쩌면 그리도 가볍고 뻔뻔스러웠으며 무책임할 수 있었는지 나 스스로 고개가 저어질 지경이다. 이 나날들을 함께 했던 숱한 여인들과 와인들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오늘은 그들 중 서른살의 내게 처음으로 와인을 가르쳤던,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에는 실패(!)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맛뵈기로 조금만 들려주기로 한다. 그녀의 이름을 오브리옹(Haut-Brion)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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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시절의 나는 집착과 질투의 화신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시간에는 도대체 무얼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지 못하면 제 성질에 겨워 입에 거품을 무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른살을 넘어서면서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집착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을 각개인의 변덕스럽고 무책임한 자유의지에 맡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기브 앤 테이크가 있다. 내가 집착하지 않는 대신 나도 그녀들에게 요구했다. 내게 집착하지 마.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든, 누구와 함께 사랑을 나누든,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미리 말해두지만 너 말고도 만나는 여자들 많아.

실제로 나는 당시에 대여섯 명의 여자들을 동시에 만났다. 그들 모두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는 뜻이 아니다. 간혹 이따금씩 마음이 아주 잘 맞는 여자들을 만나면 더블데이트 같은 것을 즐기기도 했지만 대개는 내 나름대로의 순번을 정해놓고 번갈아 가면서 만났다. 이를테면 월요일 밤에는 페트뤼스(Petrus)를 만나 소주를 마시고 함께 뻗어서 잤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그녀가 준 용돈으로 혼자 영화를 본 다음 앙겔뤼스(Angelus)에게 전화를 걸어 화요일 밤의 데이트를 즐기는 식이다. 어떤 때에는 일주일 내내 그런 식으로 일곱 명의 여자들을 만난 적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에게 어제 만난 여자와 내일 만날 여자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잔인하되 치명적인 룰이었다.

오브리옹은 당시에 만났던 여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나보다 대여섯살 위였으니 삼십대 중반의 농염한 나이였다. 그녀는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장편소설이며 소설집 따위를 여러 권 출간한 적이 있는 소설가였고, 재계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는 아버지를 둔 덕에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의 내가 가장 자주 드나든 곳이 바로 이 오브리옹의 집이다. 그녀를 남달리 좋아하거나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북한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그녀의 아담하고 어여쁜 단독주택에는 근사한 마루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유리로 된 천정 너머로 하늘이 올려다 보였다. 나는 그 마루를 ‘하늘마루’라고 불렀다.<계속>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7월 23일

조현옥

2007.07.19 04:05
*.62.89.4
아! 선생님께 '유혹적인 집' 을 결혼 조건으로 제시했다던 '80문답' 주인공이 드디여 '와인 예찬' 의 주인공이 되셨군요.^^
글을 읽으며 선생님의 젊은 나날을 들여다보니 '꽃들에게 희망을' 에 나오는 주인공 '애벌래'가 생각나네요.^^
세상이라는 거대하지만 디테일한 시스템에 같이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톱니 자국들이 무슨 바코드처럼 생기나봐요. 허무와 방황에 시달리셨던 많은 시간들이 가슴에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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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7.19 04:39
*.241.46.51
하하하 현옥 역시 못 알아듣는군...
허무와 방황...이란 '믿음의 총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이라니까...
하긴 뭐...이런 이야기는 못 알아듣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조현옥

2007.07.19 04:57
*.62.89.4
저는 그 '믿음의 총체' 안에서 'faith'와 'loyalty' 를 추구했던 내내 오히려 지독하게 허무했고 방황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 하네요.^^ 아마도 '믿음의 총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람의 총체' 였기 때문에 그런 듯 하기도 하고.... (이 말도 잘 못 알아듣고 하는 말일려나? ^^;;)
선생님처럼 어느 아침에 돈오돈수 하듯이 전에 입던 옷을 확 벗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예요. 매트릭스의 파란약을 드셨나?

정경화

2007.07.19 14:03
*.96.222.1
아.. 샘님과 옥언니의 대화는 어려워어려워~~,,ㅋㅋㅋ
어쨋든,
제 관심의 총체 와인이야기와 결부짓자면,,
북한산기슭의 아담한 단독주택은 샤또 오브리옹인거고,,
그 안에 들어있는 농염한 아가씨는 오브리옹인것이죠??
불행하게도,, 오브리옹은 샘님의 맘을 확! 사로잡지를 못했네요~
오브리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시리..ㅋㅋㅋ
아... 저 하늘마루에 앉아 천장보며 오브리옹 한 잔 들이켜봤으면...
샘님의 와인과 장미이야기는 언제들어도 잼나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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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7.07.20 10:30
*.129.236.105
아하....오브리옹.....
거기가 그곳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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