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4-27 00:28:38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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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가기 좋은 날
심산의 와인예찬(13) 이탈리아의 드라이 화이트 소아베 클라시코

날씨가 너무 좋다. 따사로운 봄볕이 늦잠을 자고 있는 내 얼굴을 간질이며 유혹한다. 이봐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언제까지 퍼질러 잠만 잘 생각이야? 딴은 그렇다. 나는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로 잠기운을 떨쳐낸 뒤 외출을 결심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출이 아니고 출근이다. 하지만 출근부에 도장을 찍는 것도 아니고 왜 이리 게으르냐고 타박할 상사도 없으니 출근이건 외출이건 다를 바가 없다. 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집필실로 향하면 출근이고, 배낭 하나 짊어지고 터벅터벅 배회하면서 나가면 외출인 셈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외출이 걸맞다.

나는 집이 있는 여의도에서부터 집필실이 있는 신촌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볼썽사나운 노숙자의 몰골이지만 세수하기도 귀찮다. 딸의 방에 들어가서 고무줄 머리띠를 하나 훔쳐 어깨까지 자란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다. 등산 배낭을 뒤져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제 쥘보 고글을 꺼내 눈꼽도 떼지 않은 눈 주변을 대충 가린다. 양말은 덥다. 맨발이 좋다. 요즘 읽고 있는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책을 배낭 속에 구겨 넣은 다음 샌달을 신고 나서니 외출 준비 끝이다.

한때 나는 여의도에서 신촌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런데 허구헌 날 술을 처먹으니 언제나 음주운전이다. 자전거를 타고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한번은 서강대교 북단 쯤에서 갑자기 핸들이 꼬여 쓰러지는 바람에 내 뒤를 바투 따라오던 화물차에 치어 그대로 골로 갈 뻔 했다. 그 이후로는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다행히 집에서 집필실까지는 걷기에 좋은 길이다. 여의도공원을 통과할 때는 아쉬운 대로 신록의 산소를 제법 들이마시고, 서강대교를 건널 때는 탁 트인 시야와 저 만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북한산의 자태를 탐닉할 듯 만끽할 수 있다.

오늘 밤섬 위쯤에 이르러 담배를 한 대 꼬나물었을 때 내 마음은 몹시 흔들렸다. 날씨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모래톱을 형성하고 있는 밤섬의 모습도 아름다웠고, 향로봉에서 비봉을 거쳐 승가봉과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도 더 할 수 없이 유혹적이었다. 나는 담배 연기에 곁들여 옅은 한숨을 내쉬며 멍청한 자문에 빠졌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소풍을 가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엊그제도 북한산에 갔었다는 것이 오늘 또 가면 안 될 이유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그 모든 유혹들을 뿌리치고 집필실에 들렀다가 심산스쿨에까지 나왔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그리고 그 기적 덕분에 불쑥 들이닥친 오래된 옛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을 소아베(Soave)라고 해두자.

소아베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햇수를 헤아려보니 처음 만난지 30년쯤 되는 친구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에는 만남이 뜸했었다. 내게는 여지껏 가끔씩이나마 얼굴을 보고 사는 고삐릿적 친구들이 10명쯤 되는데 대부분 험한 삶을 살아온 녀석들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고삐리 시절 결성했던 어설픈 폭력써클의 멤버들이다. 그 중의 한 녀석은 우리가 스무살을 통과할 즈음 죽었다.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데 정확한 사인은 그 누구도 모른다. 나머지 멤버들 모두 저마다 장편대하소설을 몇 권씩을 써낼 만큼 파란만장한 삶들을 살아왔다. 여자문제 혹은 가정문제도 개판이어서 여지껏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녀석은 나를 포함해서 딱 세 명뿐이다. 소아베는 그런 우리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img2]

잘 나가던 사업가의 아들이었던 소아베는 고삐리 시절부터 이재에 아주 밝았다. 고삐리 주제에 부업 삼아 포장마차를 운영했는데 그 벌이가 아주 짭짤했다. 덕분에 우리가 때려먹던 짱께와 꼬량주 값을 계산하는 놈은 언제나 소아베였다. 녀석이 우리들 중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가장 좋은 학과에 진학한 것을 보면 세상은 처음부터 불공평하다. 집안 좋고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놈이 공부마저 잘 한다면 이건 좀 너무했다 싶지 않은가. 녀석의 대학시절에 내가 전해들은 가장 웃기는 에피소드 하나. 소아베가 자신의 학교와 학과를 밝히면 파트너인 여학생들은 대개 배를 잡고 웃었단다. 정말 농담도 잘 하시네요. 한때는 연예인이 되려고 방송국에 시험도 볼 정도였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대학시절의 나는 얼치기 운동권이었지만 그는 얄미울만큼 현실주의자였다. 대학시절에 여의도에서 까페를 운영하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자애들을 갈아치웠다. 한번은 내가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고 나와 널부러져 있는데 소아베가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 들었다, 나와라, 내가 술 한 잔 살께. 당시의 내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술값이 나왔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오늘 르망 한대 값 벌었거든. 녀석은 주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대학시절에 처음 만났더라면 우리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삐릿적 친구들끼리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나마 청춘의 뜨겁고 지루한 터널을 함께 통과했다.

하지만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삶은 바닥과 천장을 바삐 오갔다. 모든 사업가들의 삶이 그러하듯 소아베 역시 치부와 부도 사이에서 괴로운 진자운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머세디즈 벤츠를 굴렸고, 이혼을 당했고, 외국에 대저택을 구입했고, 경제사범으로 구속되었고, 명함을 대 여섯 개씩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 날 잠적해버렸다. 녀석이 잘 나갈 때에는 우리 모임에 모델 같은 여자아이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백지수표를 던져주고 가기도 했지만, 한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면 또 회사가 도산을 했다느니 수배가 됐다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그의 삶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가 오늘 오후 갑자기 심산스쿨에 나타나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가끔씩 홈페이지에 들어와 봤는데 재미있게 사는 거 같더구나. 의외였다. 천하의 소아베 녀석이 이런 후줄근한 홈페이지에 다 들어와 볼 줄이야. 사업은 어때? 나는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때로는 묻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들도 있는 법이다. 소아베는 그러나 예의 그 쿨한 몸짓으로 어깨를 들썩해 보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사업이야 뭐 맨날 그렇지 뭐. 그리고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불현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일어났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미팅 때문에 근처에 왔다가 잠깐 들린 건데. 녀석을 현관까지 배웅하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소아베가 스쳐지나가듯 물었다. 너 요즘도 평일날 산에 다니냐? 그럼 언제 나한테도 한번 연락 주라, 같이 가보고 싶네.

[img3]

녀석이 도망치듯 사라진 다음 나는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명치 근처가 아렸다. 묻지 않아도 안다. 요즘 같은 불황에 사업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울 것인가. 자존심 때문에 몇 년 동안 친구들하고도 소식을 끊고 살던 녀석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기까지는 또 얼마나 망설였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와 함께 산에 가고 싶다고 말문을 열 때까지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 것인가. 가슴이 짠해졌다. 그리고 따뜻해졌다. 나는 녀석이 떨구듯 놓고 간 명함 속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렸다. 담주에 소풍 가자, 가까운 북한산으로, 와인 한 병 들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 녀석이 답문자를 보내왔다. 와인은 네가 준비할 거지?^^ 나는 녀석이 남긴 웃는 눈썹 모양의 문장부호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리고는 내 와인셀러를 뒤져 골라낸 와인이 바로 소아베 클라시코(Soave Classico)다.

소풍이란 쳇바퀴 도는 일상과 지긋지긋한 경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담주에 소아베와 함께 묵묵히 산길을 걷다가 어느 한적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들이킬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푸근해진다. 헬로 소아베, 네가 한때는 동 페리뇽과 로마네 콩티로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하지만 요즘처럼 소풍 가기 좋은 날, 등산복 차림으로 바위에 퍼질러 앉아 함께 홀짝거리기에는 한 병에 2만원도 안 하는 이 소아베 클라시코가 제 격이란다. 네가 싸구려 와인도 때로는 아주 근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참 좋으련만. 그러면 그 동안 각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훨씬 수월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날은 오늘처럼 봄볕이 눈 부셔 소풍 가기 좋은 날이어야 하는데.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4월 30일

profile

윤석홍

2007.04.27 08:35
*.229.145.41
청춘아, 청춘아 내 청춘을 돌려다오, 트로트 노래 한번 부르며 소아배를 마시면 느낌은 어떨까. 아, 소풍이란 단어가 가슴 짠하게 만드네여. 내일 경주 남산 은적골로 소풍이나 가볼까. 도반 불러서~~

박선주

2007.04.27 13:53
*.73.21.41
오늘은 정말 소풍가고싶은 날씨네요..
날씨에 글이 딱 맞는건지, 글에 날씨가 딱 맞는건지..^^

한수련

2007.04.27 14:08
*.235.170.238
갈수록 더 재미있었지는 와인예찬 나도 갈매기 ^^
profile

심산

2007.04.27 15:58
*.237.82.203
그래서 오늘도 서소문에서 칼국수 먹은 다음...시청 앞 광장까지 설렁설렁 걸어갔다는...^^
걸어간 김에 파타고니아 매장에 들러서 시원한 여름 남방 하나 샀다는...^^

김희자

2007.04.27 15:45
*.134.45.100
5월 1일, 근로자의 날 출산후 처음으로 산에 갈려고요. 이때 소아베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조성은

2007.04.27 20:22
*.155.154.183
날씨가 정말 좋았어요, 오늘. 근데 파타고니아 매장.. 어디 있나요?

김의선

2007.04.27 20:52
*.97.18.166
소아베 클라시코
소아베 클라시코
소아베...

잊어먹지 말고 담에 마셔봐야지...^^
profile

심산

2007.04.27 22:12
*.241.45.156
성은, 파타고니아 매장은 무교동 코오롱빌딩 지하에 있단다...
의선, 그거 사는 거 쉽지 않을껄...?^^

조인란

2007.04.28 18:23
*.173.146.238
샘의 '인간예찬'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
왜케 글을 잘 쓰시는 거야...! ㅎ
성은, 좋은 질문이야^^

조현옥

2007.06.04 23:18
*.55.82.214
진짜 '와인예찬' 이라기 보단, '인간예찬'? 담배 한 대가 맛있어 지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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