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09-17 18:43:32 IP ADRESS: *.241.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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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이 어우러진 신명나는 축제
심산의 와인예찬(42) [구름 속의 산책](알폰소 아라우, 1995)의 라스 누베스 와이너리

플롯은 너무 작위적일뿐더러 빤하여 진부함 그 자체이다. 캐릭터들 역시 지나치게 평면적이어서 헛웃음을 자아낸다. 연기 또한 형편없어서 도대체 쟤네들이 어떻게 배우가 됐을까 싶은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므로 일반 관객들에게 [구름 속의 산책]은 별 두 개 짜리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와인애호가들에게라면 사정은 다르다. 만약 당신이 와인애호가라면 나는 이 영화를 별 다섯 개 짜리 작품으로 기꺼이 추천하련다.

[구름 속의 산책]은 와인의 역사, 포도의 재배, 수확기의 축제 등을 더 없이 아름다운 화면에 담아 우리에게 선사한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참전용사인 폴 서튼(키아누 리브스)은 초코렛 세일즈를 위하여 캘리포니아 일대를 떠돌다가 빅토리아 아라공(아이타나 산체스 기종)을 만나, 그녀의 집안이 경영하는 ‘라스 누베스(Las Nubes)'라는 와이너리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포도 수확 축제를 함께 체험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먼저 아라공 집안의 할아버지인 돈 페드로(앤서니 퀸)를 따라 그들 집안의 뿌리부터 더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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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본래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새벽에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새벽 안개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페드로는 막무가내로 폴의 소매를 잡아끈다. “따라와 봐, 자네에게 보여줄 게 있어.” 그곳에는 아라공 집안의 성수(聖樹)로 떠받들고 있는 포도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금줄을 치고 성역화 해놓은 모양이 흡사 우리나라의 성황당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 집안이 스페인을 떠나 이곳 신대륙의 멕시코에 도착한 해가 1580년이야. 그때 우리 조상이 가져온 것은 옷보따리 하나와 이 포도나무 묘목 달랑 한 그루뿐이었어.”

와인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섣불리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와인이 전파된 것은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통해서였다. 그 시대의 선봉에 섰던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영화 속의 아라공 집안은 그때 멕시코에 정착하여 와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대가문으로 성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들의 후예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세운 와이너리가 바로 라스 누베스이다. 라스 누베스란 스페인어로 ‘구름’을 뜻한다. 돈 페드로는 자기 집안의 성수를 감격 어린 눈빛으로 우러러보며 이렇게 찬양한다. “보게, 이 위대한 나무야말로 우리 집안의 뿌리이고 생명의 근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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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산책]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서리와의 전쟁’이다. 포도의 재배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적(敵)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서리(frost)인데, 일반적으로 5월에 내리는 늦서리가 가장 치명적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수확 직전에 서리가 들이닥친다. 이는 보다 끔찍한 경우인데, 자칫하면 1년 농사를 모두 망칠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 들이닥친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의 이 장면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갑자기 비상종을 세차게 두들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 속 라스 누베스의 책임 경영자는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알베르토(장카를로 지아니니)이다. 그는 서리에 당한 포도알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외친다. “아직 알맹이까지 침투하진 못했어, 어서 불을 피우고 날개를 준비해!” 포도밭 여기 저기 굴뚝 모양의 난로에 장작불이 지펴진다. 폴과 빅토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와이너리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뛰쳐나와 포도밭 사이 사이에 도열한 다음 ‘날개짓’을 한다. 날개짓이란 불 피운 난로의 뜨거운 기운을 포도나무에 불어넣기 위하여 양손에 커다란 부채를 들고 하염없이 흔들어대는 작업을 뜻한다. 그 모양이 흡사 우리의 전통 무용인 부채춤 같다. 한밤중의 포도밭에서 벌어지는 이 난데없는 부채춤 장면은 신비하고도 아름답다. 이 과정의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폴과 빅토리아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 텄음은 물론이다.

수확과 파쇄 역시 이 영화가 선사하는 명장면 중의 하나이다. 한 해의 농사를 수확하는 날은 모든 농부들에게 축제가 될 수밖에 없다. 와이너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폴과 알베르토가 서로 경쟁하듯 수확 상자에 포도송이를 따넣는 장면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게 수확한 포도송이들을 커다란 오크통에 쏟아 부을 때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하다. 남자들은 저마다 민속악기들을 들고 나와 커다란 오크통 주위를 빙빙 돌며 흥겨운 음악을 연주한다.

이제 막 파쇄 작업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될 일이 있다. 바로 와이너리의 안주인 마리아(안젤리카 아라공)가 조상들과 사방의 천지신명들께 허락을 받는 일이다. 의아해하는 폴에게 돈 페드로는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전통을 설명해준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신의 허락을 얻어야만 땅의 소산들을 거둘 수 있다고 믿어왔다네.” 마리아가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틀어가며 장엄한 뿔고동을 불어댈 때 모든 사람들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천지인(天地人)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감동적인 세레모니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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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작업은 그야말로 흥겨운 놀이판이다. 포도 열매들이 가득 차 있는 오크통은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다. 결혼한 여자들은 맨발로 그 통 안에 들어가 포도송이들을 마구 밟는다. 서로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신나게 뛰노는 모습이 흡사 우리의 강강수월래 같다. 오크통 바깥의 남자들은 여자들과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계속 흥겨운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여인들의 치마에 붉은 포도물이 든다. 여인들의 머리카락에서 갓 수확한 포도의 과즙들이 튕겨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나오고 어린아이 같은 장난질이 계속 된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 한복판에 들어가 있으면 어쩔 것인가. 없던 사랑도 생겨날 판이다. 그야말로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다.

영화 속의 라스 누베스는 캘리포니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와이너리들의 이곳저곳에서 촬영한 화면들을 편집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구체적으로 나파 밸리의 마운트 비더 와이너리와 마야카마스 와이너리, 소노마 밸리의 헤이우드 빈야드, 그리고 세인트 헬레나의 베린저 빈야드, 덕혼 빈야드, 찰스 크룩 와이너리 레드우드 셀러에서 촬영되었다. 모두 다 죽기 전에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와이너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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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8년 9월 21일

최상식

2008.09.17 21:58
*.108.15.70
서른이 되기전에 배우겠습니다^^

조현옥

2008.09.18 02:27
*.53.218.52
저 통에서 신나게 포도를 밟다 보면, 한 해 동안의 노고와 스트레스가 몽땅 날아 가겠어요.^^
재밌겠다!!^0^

김주영

2008.09.18 15:27
*.121.66.212
저영화를 보면서 과연 실제로 수확전에 서리가내리면
수백수천헥타아르에 달하는
포도밭에 저런 굴뚝을 설치하고 불을피울수있을까?라고 생각 했다오..
이게 실젠가? 영화적 설정인가?
아시는 분은 답변 부탁합니다...
profile

심산

2008.09.18 18:25
*.237.80.250
김준철 원장님 말씀에 따르면 실제 상황이라네...
물론 저건 1945년의 일이고...요즘은 커다란 온풍송풍기(촬영현장에서 쓰는)를 사용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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