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08-24 21:34:06 IP ADRESS: *.235.16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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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가난한 뉴요커들의 데일리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4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데이비드 프랭클, 2006)의 루피노 듀칼레

 

지난 여름 일군의 여성 시나리오작가들과 함께 오사카에 다녀왔다. 아시다시피 오사카라면 교토 및 나라를 지척에 두고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교토의 고찰도 나라의 사슴공원도 관심 밖이었다. 오직 눈을 뜨자마자 세일 중인 백화점 앞으로 달려가 길게 줄을 선채 하루를 시작해서 피곤에 지쳐 눈이 감길 때까지 온갖 쇼핑백들을 주렁 주렁 매단채 오사카의 상점 거리들을 쏘다녔을 뿐이다.

 

남성작가들의 시선이 고왔을 리 없다. 고참에 속하는 여성작가가 잔뜩 겸연쩍은 표정으로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가 좀 한심해 보이죠?” 하지만 나의 대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전혀!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한다 해도 난 명품족들을 이해해요.” 여성작가가 의심에 찬 눈초리를 번득였으나 에누리 없는 사실이다.

 

내게는 명품족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내가 즐겨 입는 허름한 등산복 역시 일종의 명품인 것이다. 나는 파타고니아나 몽벨이 아니면 몸에 걸치기도 싫다. 오사카에 머무는 내내 내가 한 일이라고는 미리 정보를 수집해간 와인숍들의 창고를 샅샅이 뒤지며 희귀한 명품 와인들을 사 모으는 일이었다. 나의 그런 행태가 명품 쇼핑에 목숨을 거는 여자들과 도대체 어떻게 다른가?

 

이제 당신은 나까지 싸잡아 ‘명품에 미친’ 사람들을 비난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산다. 명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과 그것에 빠진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사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도 그것은 흥미로운 논쟁거리이다. 앤디(앤 해서웨이)로부터 마크 제이콥스의 가방을 선물 받은 릴리(트레이시 톰스)가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지르자 네이트(애드리안 그리니어)가 비아냥거린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그렇게 가방에 목을 매? 그냥 온갖 잡동사니들을 쑤셔 넣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야?” 아마도 게이일 듯 보이는 덕(리치 소머)이 정색을 하며 변호한다. “패션이란 기능과 관련된 것이 아니야. 자기정체성을 아이콘화해서 표출하는 것이지.”

 

만약 당신이 명품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이다. 이 영화는 어떤 뜻에서 명품으로 도배질한 두 시간 짜리 광고필름처럼 보인다. 캘빈 클라인이나 DKNY 같은 대중적 브랜드에서부터 이브 생 로랑, 발렌티노, 도나 카렌, 갈리아노, 샤넬, 베르사체, 마크 제이콥스, 로리스 아자로, 에르메스, 지미 추, 돌체, 디오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스타 디자이너들의 성찬이 가득하여 그것들을 눈요기하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질 지경이다.

 

뉴욕과 파리를 바삐 오가며 화려한 패션산업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에서 와인이 빠질 리 없다. 그런데 의외로 제목과 걸맞지 않게 명품 와인에서는 살짝 비껴나가 있다. 앤디를 사이에 놓고 네이트와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세련된 작가 크리스찬(사이먼 베이커)이 즐겨마시는 와인은 물론 샴페인인데 그 라벨은 분명치 않다. 앤디의 멘토 역할을 맡고 있는 아트디렉터 나이겔(스탠리 투치)의 승진 자축 샴페인 역시 스크린에서 분명히 인식되진 않지만 병구 쪽에 붉은 리본이 얼핏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멈(Mumm)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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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통하여 대중적인 인지도를 한껏 높이게 된 와인은 이탈리아의 루피노(Ruffino)에서 만든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리세르바 듀칼레(Riserva Ducale)인데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유력 와인잡지 [와인 스펙테이터]에 따르면 ‘뉴욕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이라고 하니 대중적인 중저가 베스트셀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와인인데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니 당장에라도 시음해보시기 바란다. 짙은 루비빛의 와인에서 올라오는 부드러운 탄닌과 농익은 과일향이 제법 근사하다. 와인애호가들은 흔히 줄여서 ‘듀칼레’라고 부르며 고기집에서 즐겨 마신다.

 

명품으로 도배를 한 영화에서 기껏해야 듀칼레라니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도 하다. 하지만 영화 속의 듀칼레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 촌뜨기 대졸자 앤디가 세계 최고의 패션잡지 [런웨이]에 입사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가난한 친구들의 모임이다. 이런 자리에 명품 와인이 등장하면 그것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터. 그렇다. 듀칼레는 가난한 뉴요커들의 데일리 와인이다. 그래서 뉴욕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고 이 영화 덕분에 ‘뉴요커의 와인’이라는 황송한 애칭(!)마저 얻게 된 것이다.

 

영화 속의 앤디는 결국 촌티를 훌훌 벗어버리고 명품으로 제 몸을 휘감으며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간다. 앤디가 결국 직장의 고참 비서인 에밀리(에밀리 블런트)마저 제치고 그녀 대신 파리의 패션쇼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교통사고를 당해 기브스를 한 채 그 동안 다이어트 때문에 참았던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으며 에밀리가 내뱉는 한탄이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네가 결국엔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시게 된다는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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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칼레는 키안티 클라시코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이탈리아 토종 품종인 산조베제를 베이스로 하여 카나이올로와 말바지아 따위를 섞어 넣은 ‘촌티 나는’ 와인이다. 기껏해야 그런 듀칼레나 마시던 앤디가 이제 프랑스 파리에까지 진출하여 ‘세련된’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에밀리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밀리의 이런 평가가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와인애호가들이라면 그녀가 잔뜩 볼멘 소리로 울먹이며 “카베르네 소비뇽!”을 외칠 때 배를 잡고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러나 제법 균형감각을 갖춘 영화다. 이 작품의 전개 과정이 다소 재수 없게 느껴질지라도 끝까지 가보라. 명품 패션이나 명품 와인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기분 좋은 사실을 이 영화는 일깨워준다. 그리하여 근사한 엔딩 타이틀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 옛날 가난한 연인과 함께 마시던 ‘촌티 나는 듀칼레'를 다시 한번 마시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중앙SUNDAY] 2008년 8월 31일

이정환

2008.08.25 01:02
*.222.56.32
심산스쿨에 매일같이 들어오면서 <심산의 와인예찬>이 계속 연재되고 있단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니..
아마도 꽤나 애독자가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와인에는 무지 하나...

조현옥

2008.08.25 02:38
*.53.218.59
저도 와인에는 무지하나,
어릴 때 읽었던 어떤 책 어느 구절이 어른이 되어 무심코 무릎치게 만들 듯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영

2008.08.26 00:19
*.142.170.18
악마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시고 천사는 듀칼레를 마신다???ㅋㅋㅋ

조현옥

2008.08.26 23:45
*.53.218.59
저는 수퍼에서 칠레 까베르네 쇼비뇽을 사서 마시면서 까베르네 쇼비뇽이 정말 맛없는 와인인 줄 알았어요.
근데 보니까 많은 맛 좋은 와인에서 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ㅡ_ㅡ
아~! 입맛이건 눈맛이건 높아지면 안 되는디...^^;

심정욱

2008.09.01 15:43
*.174.6.153
정말 듀칼레 동네 슈퍼에서 팝니다.
뉴요커가 아닌 텍산들에게도 데일리 와인 수준이더군요. --;;
삼촌 한번 들리셔야해요. 시내곳곳에 끝내주는 와인샵 다 찾아놨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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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8.09.10 02:08
*.131.158.52
알았어 정욱! 올겨울에 어쩌면 뉴욕에서 몇 주 보낼 것 같은데
가게 되면 텍사스에도 들르도록 스케줄을 짜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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