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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와인예찬(28) 에디트 피아프 절정의 와인
영화 <라비앙로즈>와 샤토 랑젤뤼스 1938
노래하는 피아프는 흡사 참새 같다.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본명은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이다. 그녀가 막 돼먹은 십대 불량소녀로서 거리에서 노래품을 팔 때 그 재능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의 사장 루이 르플레였다. 르플레는 그녀를 데려와 자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다음 찬탄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는 꼭 참새처럼 노래하는구나. 네 이름을 참새라고 짓자.” 프랑스어의 ‘피아프(piaf)는 우리말의 ’참새‘라는 뜻이다.
그 참새는 그러나 즐겁게 지저귀지 않는다. 그 참새는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고 세상을 조롱하며 때로는 울부짖고 때로는 절규한다. 이 기이한 참새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올리비에 다앙 감독의 최신작 <라비앙로즈>(2007)는 이 ‘서글프고 아름다운 참새’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워낙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여가수인지라 그녀의 생애를 다룬 영화는 그 이전에도 여러 편 있었다. 가령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나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1983) 같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에디트 피아프의 핵심과 절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번에 개봉된 <라비앙로즈>가 아닐까 싶다.
우선 우리말 제목인 <라비앙로즈>는 제멋대로 갖다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두어야 겠다. <라비앙로즈>가 에디트 피아프 최대의 히트곡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야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1946) 발표된 이 작품은 그녀가 이브 몽탕과 사랑에 빠졌을 때 단 15분만에 작곡했다하여 더 유명해진 노래이다. 영화 속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 공연(올랭피아, 1962)에서 건강의 악화로 무대에서 연거푸 쓰러지는 그녀를 위해 관객들이 붉은 장미들을 가득 던져주었다는 일화 역시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는 <라 몸므(La Mome)>이다. 우리말로는 ‘어린애’나 ‘애새끼’ 정도에 해당하며, 속어로는 ‘젊은 계집’ 혹은 ‘어린 정부’라는 뜻이다. 그녀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하층 계급 출신의 헤픈 여자’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띄고 있는 제목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그녀의 삶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 해도 비참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어머니는 거리의 가수였는데 무책임하고 비루한 여자였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거리의 곡예사였는데 그 초라한 곡예솜씨는 씁쓸한 웃음을 자아낼 뿐이다. 마지못해 그녀를 떠맡은 친할머니는 매음굴의 뚜쟁이였다. 오죽 했으면 에디트 피아프 유년시절 최고의 추억이라는 것이 그 매음굴에서 일하는 고참 창녀와의 애틋한 시간들이었겠는가. 에디트는 진흙창 혹은 시궁창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려있는 한(恨) 혹은 서러움의 정조는 그녀의 삶 자체에서 숙성되어 나온 것이다.
<라비앙로즈>가 영화 그 자체로서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에디트 피아프 역을 맡은 마리옹 코티야르의 연기다. 그녀는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와인영화 <어느 멋진 순간>(2006)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국내용 배우’였다. 사실 위의 영화에서도 그녀가 맡은 역할은 미미했다. 그저 예쁘장하고 별 생각 없어 보이는 프랑스의 시골 처녀였을 뿐이다. 하지만 <라비앙로즈>에서 그녀는 전율할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흔한 표현이지만 에디트 피아프가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만약 <라비앙로즈>가 미국영화였더라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다. 마리옹 코티야르는 이 작품으로 유럽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팜스프링국제영화제, 카부르 로맨틱영화제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환경운동가로서도 오래동안 활동하여 현재 그린피스의 대변인으로 일한다고 하니 정말 멋진 아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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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 속의 와인들을 조금 꼼꼼히 짚어보자. 에디트에게는 모몬느(실비 데스튀드)라는 단짝 친구가 있다.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십대의 불량소녀이다. 이 가진 것 없지만 웃음 그칠 일도 없는 십대 소녀들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 틈틈이 홀짝거리며 마시는 와인이 있다. 라벨조차 붙어 있지 않은 이른바 ‘막와인’인데 보나마나 싸구려 뱅 드 타블(Vin de Table)일 것이다. 프랑스의 하층 계급에게 허락된 술이란 그런 것밖에 없다. 그나마 길거리에서 그렇게 병나발을 불어대다가는 영화 속에서 보듯 경찰에게 제지를 당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노상음주 자체가 불법이다. 정 마시고 싶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종이봉투 따위로 병을 가린 채 마셔야 한다.
에디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르플레(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자신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시켜본 다음 지배인에게 말한다. “저 애에게 술 한잔 줘.” 그때 에디트가 받아든 술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샴페인이다. 에디트의 삶이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샴페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부와 성공의 상징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바삐 오가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샴페인 따는 장면이다. 나이트클럽의 손님들은 에디트의 노래를 들으며 으레히 샴페인 한 잔을 시킨다. 훗날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하여 안하무인격의 독재자로 변신한 에디트가 술에 잔뜩 취해 엎지르는 것도 샴페인이다. 에디트에게 와서 굽신대는 최고급 레스토랑의 지배인에게 그녀는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명령한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공짜 샴페인을 내놓으라구!”
실제의 에디트 피아프에게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다. 37세때 결혼하여 4년을 함께 산 첫 번째 남편은 가수인 자크 피스였고, 45세때 결혼한 두 번째 남편은 20살 연하의 헤어드레서였다. 하지만 남편보다 많았던 것이 남자친구와 애인들이다. 장 콕토, 모리스 슈발리에, 이브 몽탕, 샤를르 아즈나부르 등이 모두 에디트의 남자들이었다. 그러나 <라비앙로즈>라는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애인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프랑스 출신의 유부남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장 피에르 마르탱)이다. 에디트가 마르셀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의 뉴욕 순회공연 때였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 장면이 몹시도 유머러스하고 인상적이다.
처음 마르셀이 정한 데이트 장소는 미국식 선술집이었다. 자신 앞에 놓여진 미국식 샌드위치를 보고 에디트는 입맛을 잃는다. 마르셀이 왜 먹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느냐고 묻자 에디트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이건 무슨 축축한 개고기 같군요.” 미국식 음식문화에 대한 프랑스인의 경멸이다. 마르셀이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음식을 계속 먹어대자 에디트는 선술집을 휘 둘러보며 조롱하듯 말한다. “이런 데서는 여자들한테 저녁을 사도 비용이 얼마 안 나오겠군요?” 그리고 화면은 순식간에 프랑스식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뀐다. 에디트의 표정 역시 행복에 겨운 여자의 미소로 가득 찬다. 마르셀이 메뉴를 들여다보자 에디트가 불쑥 끼어든다. “제가 정할게요! 비프 스테이크, 그리고 샤토 랑젤뤼스(Chateau L'Angelus) 1938!"
마르셀과 자신의 와인잔에 샤토 랑젤뤼스가 따라지자 에디트가 지어보이던 그 행복한 미소가 지금도 눈 앞에 어른거린다. 아마도 <라비앙로즈>를 통해서 그녀가 지어보였던 가장 행복한 미소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녀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근사한 저녁식사 그리고 샤토 랑젤뤼스 1938. 시궁창에서 태어나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다. 매음굴에서 자라나며 하마터면 실명하여 장님이 될 뻔 했던 그녀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학교라고는 근처에도 못 가봤고,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 겨우 손에 쥔 푼돈조차 언제나 깡패들에게 상납해야만 됐던 그녀다. 스타가 된 다음에도 ‘몸므(Mome)'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마약과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이제 뉴욕의 근사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내 인생의 남자’와 마주 앉아 ‘최고의 와인’을 마시고 있다. 그렇다. 샤토 랑젤뤼스 1938이야말로 에디트 피아프 인생 ‘절정의 와인’이었던 것이다.
샤토 랑젤뤼스는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이다. 하지만 메독에 속해있지 않아 1855년의 그랑 크뤼 클라세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샤토 랑젤뤼스는 지롱드 강 우안(右岸)의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을 대표하는 와인이다. 이 지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대신 카베르네 프랑을 쓰며 메를로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 우아하고 그윽한 뒷맛이 일품이다. 극장에서 <라비앙로즈>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와인이 너무나 땡겼다. 영화를 보고 나서 OST까지 손에 넣게 되자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들으며 오래동안 아껴두었던 샤토 랑젤뤼스의 코르크를 딴다. 탁하고 처연한 목소리 위로 랑젤뤼스의 그윽한 향기가 오롯이 피어오른다. 아직은 마실 때가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에디트는 다음 곡을 또 그 다음 곡을 불러댄다. 하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심장의 외침, 라비앙로즈. 아직도 마실 때가 아니다. 더 기다리기로 한다. 빠담 빠담 빠담, 사랑의 찬가, 아니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일러스트 이은
[ARENA] 2008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