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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오기 전에 그녀와 단둘이
심산의 와인예찬(27) 영화 [카사블랑카]와 샴페인 뵈브 클리코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1942)는 ‘클래식’과 ‘컬트’라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된 가치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드문 영화다. 이 영화가 이른바 ‘할리우드 클래식’의 대표선수격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신이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0편이니 AFI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 100편이니 미국인이 꼽은 내 인생의 영화 탑텐이니 하는 따위의 온갖 리스트에서 [대부](1972)와 더불어 늘 1,2위를 다투는 작품이 바로 [카사블랑카]이다. 1942년에서 1943년에 걸쳐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2위와 현격한 격차를 벌리며 흥행 선두를 달린 것도 바로 이 작품이다.
[카사블랑카]가 일종의 ‘컬트’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이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2007년 현재까지도 단일 영화의 팬클럽으로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사블랑카 팬클럽’이다. 세계 전역에 편재해 있는 이런 팬클럽들 중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카사블랑카 동호회’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 등장하는 의상과 헤어스타일과 소품들로 중무장을 한 채 파티장에 모여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대사들을 읊조리며 밤새도록 논다. 영화 [록키 호러 픽처쇼](1975)의 팬클럽도 이런 류의 해괴한 파티로 유명하지만 [카사블랑카] 팬클럽의 파티에 비하면 그 규모나 전통에서 어린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영화가 개봉된 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류의 팬클럽 파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문화사적 사건이다.
[카사블랑카]의 컬트화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을 꼽으라면 물론 이론의 여지가 없이 험프리 보가트(1899-1957)이다. 삐딱하게 쓴 중절모, 완고한 인상의 트렌치 코트,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빨아들이는 담배연기, 쉬어터진 듯 음산한 목소리, 그리고 시니컬한 대사와 쿨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 [말타의 매](1941)에서 선을 보이고 [빅슬립](1946)에서 완성을 거둔 이 ‘보가트 스타일’이 가장 매혹적으로 빛을 발했던 영화가 바로 [카사블랑카]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하나. [카사블랑카]의 릭(험프리 보가트)은 좀처럼 여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캐릭터이다. 아마도 그와 하룻밤을 보냈을 법한 ‘파란 앵무새’라는 술집의 여주인이 릭을 다그친다.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어요? 릭은 대답한다. “오래된 옛 일은 기억나지 않아.” 여주인은 그에게 매달린다. 오늘밤에는 제게로 오실 건가요? 릭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다. “먼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
[카사블랑카]는 이른바 ‘텍스트가 두꺼운’ 작품이다. 이 작품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속속들이 즐기려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써도 모자랄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분석들 중의 하나는 이 작품이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을 합리화”하는 교묘한 프로파간다였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잊어버리자.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카사블랑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서다.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유럽대륙,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들이 모여드는 모로코의 작은 도시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에서 번화한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시니컬한 남자 릭, 그리고 그 남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운명적인 사랑의 여인 일자(잉그리드 버그만).
한때 전세계 뭇남성들로부터 ‘꿈 속의 연인(Dream Lover)'이라 불리우던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을 보고 싶은가? 정답은 [카사블랑카] 안에 있다. [카사블랑카] 촬영 당시 험프리 보가트는 43세, 잉그리드 버그만은 27세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영화 속의 릭이 일자를 '꼬마(kid)'라고 부르는 것이 더 없이 잘 어울린다. 스웨덴 출신의 이 여배우는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전에 일찌감치 결혼하여 당시에는 이미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영화 속의 일자는 더 없이 순수하고 우아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카사블랑카]에서 이 멋진 두 남녀를 연결시켜 주는 키워드는 무엇이었던가? 바로 재즈와 와인이다.
[카사블랑카]가 유행시킨 대사들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다시 한번 연주해줘요, 샘(Play it again, Sam)." 오죽하면 훗날 우디 알렌이 이 대사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까지 만들었겠는가? 샘은 릭이 데리고 다니는 흑인 재즈피아니스트이다. 비련의 이별 이후 우연히 다시 릭의 술집에 오게된 일자는 샘에게 간청한다. 그 시절 자기들 사랑의 나날에 연주했던 그 노래를 다시 불러달라고. 그 노래가 바로 오늘날까지도 재즈 스탠더드로 사랑받고 있는 [세월이 가면](As Time Goes By)이다. 이 노래의 로맨틱하고도 서글픈 멜로디와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는 지금도 나를 전율케 한다. “키쓰는 키쓰이고 한숨은 한숨일 뿐.”
샘이 [세월이 가면]을 부를 때 릭은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며 행복했던 파리의 사랑을 회상한다. 독일군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의 파리이다. 그곳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여인 일자는 지금 그의 품 안에 있다. “자, 독일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 샴페인들을 다 마셔버리자구, 아직도 세 병이나 남았어.” 펑! 펑! 펑! [카사블랑카]에는 샴페인을 따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경쾌한 개봉음과 함께 쏟아져나와 와인글래스 가득 황홀한 기포들을 끊임없이 꽃 피워내는 샴페인! 그 샴페인 잔을 들고 일자와 눈을 맞추며 릭은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명대사를 읊조린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
그때 그들이 마신 샴페인은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와인잡지 혹은 영화잡지를 보면 다름 아닌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Ponsardin)였다고 한다. 뵈브 클리코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샴페인이어서 그 짙은 노란색의 인상적인 에티켓(라벨)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런데 영화 속의 그 장면을 아무리 되풀이하여 보아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흑백필름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1940년대의 뵈브 클리코는 현재와는 다른 에티켓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앞부분에 그 샴페인에 대한 힌트가 나오기는 한다. 파리를 함락시킨 독일군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까지 쳐들어와 릭의 술집에서 거만하게 주문하는 것이다. “샴페인과 캐비어!” 그러자 그에게 아부하는 자가 옆에서 거든다. “그렇다면 샴페인은 1926년산 버트리코로 하시지요.”
버트리코? 한글 자막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명한 샴페인 중에 버트리코라는 것이 있었나? 하지만 그 장면을 반복해서 보다가 나는 갑자기 ‘버트리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배가 아프게 웃어댔다. 버트리코란 다름 아닌 뵈브 클리코의 ‘콩글리쉬적 오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뒤로 아귀가 맞는다. 파리에서 릭은 일자와 눈을 맞추며 속삭인다. 독일군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 샴페인을 다 마셔버리자구. 독일군은 파리를 함락시킨 다음 카사블랑카에까지 진출하여 릭의 술집에서 샴페인을 마신다. 정복자답게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그 값비싼 캐비어와 함께 천하의 뵈브 클리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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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브 클리코는 1772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샴페인의 명가(名家)이다. 불어의 뵈브(veuve)는 우리 말의 과부(寡婦)에 해당한다. 1805년, 27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클리코 퐁사르댕은 할머니로 늙어죽기까지의 남은 평생을 오직 보다 나은 샴페인 만들기에 바친 인물이다. 그녀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샴페인 병 내의 2차 발효시 발생하는 이스트 찌꺼기를 말끔하게 제거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퓌피트르(pupitre)라는 장치의 발명이다. 이 회사 최고의 제품은 그녀가 하사받았던 명예로운 칭호를 그대로 따서 ‘위대한 부인(La Grande Dame)'이라고 불리운다. 본래 일반적인 샴페인에는 빈티지 표시를 하지 않는다. [카사블랑카]에 등장하는 1926년산 뵈브 클리코란 특별한 해에만 생산되는 빈티지 샴페인을 뜻한다.
[카사블랑카]의 주요 무대는 릭이 운영하는 카지노 겸 술집 ‘카페 아메리켄느’이다. 덕분에 이 영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들이 등장한다. 릭이 혼자 마실 때의 술은 버번(위스키)이고, 손님들끼리 왁자지껄 마시는 술은 꼬냑(브랜디)이다. 하지만 릭이 일자와 마시는 술은 언제나 와인이다. 레드와인도 아니고 화이트와인도 아니다. 오직 프랑스 샴페인 지방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 즉 샴페인뿐이다. 그 혼란과 야만의 시대에 릭은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다 마셔버리자구. 자, 그대 눈동자에 건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연 릭의 시대보다 안전하고 이성적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의 대사를 읊조리는 수밖에 없다.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다 마셔버리자. Here's Looking at You, Kid!
일러스트 이은
[ARENA] 200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