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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 없었던 본드의 꿈
심산의 와인예찬(55) [007 여왕폐하 대작전](피터 헌트, 1969)의 보드카 마티니
편집진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이제 제발 동 페리뇽 타령은 그만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리즈 6번째 작품인 [007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피터 헌트, 1969)에 등장하는 와인이 또 다시 동 페리뇽(!)이다. 잠시 고민했다. [여왕폐하 대작전]은 건너뛸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작품인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 이 글을 지면에서 볼 수 있게 되신다면 부디 편집진의 너그러운 아량에 따스한 박수를 보내주시라. 나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종류의 술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면피하련다.
6번째 작품에서 007이 바뀐 것은 순전히 숀 코너리의 고집 때문이었다. [두번 산다](5/1967)를 찍을 당시 37세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의 액션은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한사코 차기작의 출연을 거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동안 돈도 벌만큼 벌었을 뿐더러 배우로서의 자신의 이미지가 007로 고착되어 버리는 것이 싫어서 그리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급해진 제작진 앞에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 갑자기 나타난 배우가 바로 조지 레젠비(1939- )였다.
당시의 홍보 자료들을 보면 상심한 제작자가 머리를 손질하러 미장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쳤는데 “첫눈에 007 역을 맡을 배우임을 알아보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호주 출신의 무명 배우였던 조지 레젠비는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제임스 본드처럼 분장(!)한 다음 제작자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차려입으면 제임스 본드처럼 보일 수 있을까? 간단하다. 숀 코너리의 개인 양복점에 가서 양복을 맞추어 입고, 롤렉스 시계를 손목에 차고, 애스턴 마틴 차를 타고 나타나면 된다. 조지 레젠비는 그렇게 하여 제2대 제임스 본드 역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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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폐하 대작전]을 보면 조지 레젠비를 007로 각인시키려는 제작진의 노력이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가상하다. [살인번호](1/1962)에서부터 [두번 산다](5/1967)에 이르기까지 전작들에 나오는 주요 장면들을 재편집하여 삽입하였는가 하면 그 작품들 속에 등장했던 소도구들까지 죄다 꺼내왔다. 술에 대한 취향 역시 전임자의 그것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시리즈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본드걸로 등장하는 백작부인(다이애나 리그)의 호텔방으로 들어갈 때 그는 이렇게 주문한다. “동 페리뇽 1957년과 캐비어를 보내주시오.”
호텔의 바에서 그가 주문할 독한 술 역시 이미 정해져 있다. “보드카 마티니, 휘젖지 않고 흔들어서.” 전임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다양한 술 취향도 슬쩍 드러난다. 피즈 글로리아 레스토랑에서는 몰트 위스키와 물을 시키는가 하면, 격렬한 스키 및 봅슬레드를 타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브랜디 가져와, 물론 오성급 에네시(Five Star Hennessy)로.”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서, 조지 레젠비는 007이라는 캐릭터에 안착하지 못하고 외면당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 영화 속의 007은 낯설다. 이전의 007에 비해 지나치게 진중하고 순정파이며 비극적이다. 그는 조직의 명령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블로펠트(테리 사발라스)를 쫓는다. 심지어 백작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나머지 조직에 사표를 제출하고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한다. 이 영화는 블로펠트 일당이 007의 아내를 사살한 직후 슬픔과 허무감에 사로잡혀 흐느끼는 조지 레젠비를 비추며 바삐 끝난다. 어느 모로 보나 기존의 007 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캐릭터요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박스오피스가 말해준다. [여왕폐하 대작전]은 최악의 흥행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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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해 없기 바란다. 흥행성적이 곧 작품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고백이 되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사랑에 빠진 007 혹은 인간적인 고뇌에 몸부림치는 007! 제작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007 팬들은 치를 떨지 몰라도 내게는 제법 매력적이다. 어떤 뜻에서 [여왕폐하 대작전]의 007은 시리즈의 ‘돌연변이’였고, 시대를 너무 앞서간 ‘컬트’였다. 이 위험한 변신이 성공하는 데에는 무려 3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카지노 로열](21/2006)과 [퀀텀 오브 솔러스](22/2008)를 두고 하는 말이다.
007과 백작부인이 스위스의 한 샬레(오두막)에서 나누는 러브신이 인상적이다.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신혼살림 차릴 곳을 꿈꾸어본다. 아카시아 애버뉴, 벨그라브 스퀘어, 베네토, 파리, 모나코? 언젠가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곳들이다. “그 동안 내게는 시간이 없었어, 이제 사표를 내고 나면 우리 둘이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잊혀지지 않는 007의 대사다.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한 동명의 주제가(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가 흐르면서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펼쳐지던 두 연인의 데이트 시퀀스도 더 없이 아름답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여왕폐하 대작전]의 주요 로케이션은 스위스 알프스다. 슈테헬베르크(922m)에서 쉴트호른 산(2970m)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는 알프스 최난 최장의 코스다. 쉴트호른 산의 정상에는 세계 최초의 산정 회전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피즈 글로리아’가 있다. [여왕폐하 대작전]은 1967년에 이 케이블카와 레스토랑이 완성되자마자 그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융프라우(4158m), 묀히(4107m), 아이거(3970m) 등 알프스 고봉 200여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멋진 곳이다. 언젠가 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시거든 못 다 이룬 본드의 꿈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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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 마티니, 휘젖지 않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007이 즐겨 마시는 칵테일로서 시리즈 전작품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반복 주문된다. 로저 무어가 “전세계의 바텐더들이 007을 보면 묻지도 않고 이걸 들이민다”면서 웃음을 터뜨렸을 만큼 유명해져서 ‘007 칵테일’이라고도 불리운다. 보드카와 마티니를 섞은 다음 ‘흔들지 않고 휘저어(Stirred Not Shaken)’ 주면 007 칵테일이 아니다.
[심산스쿨] 2009년 4월 25일
그리고 위의 본문과는 달리 '편집진의 아량'이 없어서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의례적인 봄철 지면개편'으로 연재를 중단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의문이다...007 시리즈에 대해서 쓰려면 20회 가까운 분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지난해 말에 미리 물어봤다
"이 연재 시작하면 20회 가까이 연재해야 되는데 괜찮겠어?"
그들은 "예스!"라고 했고 그래서 연재를 시작했는데...1/3도 못가서 중단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내가 글을 너무 못써서?
혹은 그놈의 '동페리뇽 타령' 때문에...?
아닌 거 같다
연재 중단 1주일 전에 [씨네21]에 쓴 '기형도의 추억' 속에서
중앙일보를 은근히...아니 노골적으로 경멸(!)했기 때문에...?
설마 그 정도로 치졸할 수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최근 신문과 방송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줄줄이 쫓겨나고 있는 중이다
씨방새들...솔직히 관심도 없다
니들 꼴리는대로 해라
여하튼 그래서...[심산의 와인예찬]이 연재 지면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이태리 여행을 갔다왔고 제주도에서 놀다왔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다가 컴터를 켜보니 이 글이 있더라
잠시 새로운 지면을 알아볼까...하다가 구차스러운 것 같아서 그만 뒀다
"심산스쿨 홈페이지에다가 연재하지 뭐..."ㅋㅋㅋ
솔직히 이게 제일 편하다
이제는 원고 매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눈치 볼 사람도 없다
걍 원하는 만큼 원하는 시간에 쓰면 된다
[심산의 와인예찬]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긴 있다
난...마감이 없으면 글을 안 쓴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글을 쓸까?
잘 모르겠다...
뭐...어찌 어찌 되겠지
모든 이에게 주어진 삶이 있듯이
모든 글에게도 주어진 길이 있다
아마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