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12-13 03:11:08 IP ADRESS: *.241.4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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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만년설에 적셔진 흙내음
심산의 와인예찬(4) 말벡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걷기 위주의 산행(walking)을 즐기는 사람들이 꼽는 국내 최고의 산이 대개 지리산이라면, 등반 위주의 산행(climbing)을 즐기는 사람들이 꼽는 그것은 예외 없이 설악산이다. 덕분에 산사람들은 크게 ‘지리산파’와 ‘설악산파’로 나뉘는 것이다. 보통 젊은 날에는 바위가 험준한 골산(骨山)을 좋아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흙 언덕들이 넘실거리는 육산(肉山)에 귀의하는 편인데, 나라는 인간은 어찌된 일인지 그 반대의 경로를 밟아왔다. 이십대까지는 명실상부한 지리산파에 속해 있다가 서른을 넘어서서 암벽등반을 시작한 까닭에 설악산파로 개종하게 된 것이다.

암벽등반에 빠져들기 시작한 십 수년 전의 일이다. 나로부터 바위를 배웠으되 나보다 훨씬 더 바위를 잘 하게 된 후배 녀석이 하나 있었다. 녀석의 이름을 ‘말벡(Malbec)'이라고 해두자. 평생토록 번듯한 직장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우리는 직장인들이 바글대는 주말을 피해 언제나 평일 낮에 바위에 붙곤 했다. 도봉산 선인봉이나 북한산 인수봉에서 두어 피치 정도 오른 다음 뒤돌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홀짝거리는 와인 맛은 언제나 감미로왔다. “너도 내일 모레면 서른이다? 여자는 안 만나냐?” 말벡은 멋쩍게 피식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여자는 산 타는 놈들 싫어하잖아요.”

그러던 녀석이 임자를 만났다. 산에 오르는 걸 이해할뿐더러 암벽등반도 직접 해보고 싶어하는 어여쁜 아가씨가 생겨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지리’라고 해두자. 말벡과 내게서 바위를 배운 지리는 어느날 자기가 선등(先登)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바위 머리를 얹겠다”는 뜻이다. 지리가 올라갈 때 확보(belay)는 말벡이 맡았다. 말벡은 저 만치 위에서 바들 바들 떨며 올라가고 있는 지리의 뒷모습을 흘낏거리면서 자랑스럽게 내게 속삭였다. “몸매 끝내주지?” 하지만 내가 그녀의 몸매를 제대로 감상하려 하기도 전에 지리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추락! 추라악!”

말벡이 제대로 확보를 해주었던 덕에 그녀의 추락거리는 일 미터 정도 밖에 안되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선등을 하다가 추락을 당했을 때의 공포감이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확보지점까지 내려왔고 그녀가 오르지 못한 피치는 이제 말벡에게 넘겨졌다. 나는 말벡의 확보를 보며 지리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말벡 저 자식, 무뚝뚝해 보여도 속이 참 깊은 놈이에요.” 그때까지도 평정심을 되찾지 못한 지리는 담배 하나를 빼어 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 알아요, 바위 친구로는 최고죠.” 어쩌면 그쯤에서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바위 친구요? 애인 아니구요?” 지리는 어이없다는 듯 깔깔대고 웃었다. “애인? 바위 타는 남자랑 연애를 하면 평생 속이 새까맣게 탈 텐데요?”

시나리오 작법서들을 뒤적이다 보면 이따금씩 그럴싸한 격언들을 여럿 발견한다. 나로 하여금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 격언들 중의 하나는 이런 것이다. “대사는 언표(言表)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리의 저 부정이 진실이었는지의 여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쏜살 같이 흘러서 말벡은 지리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식에 나도 물론 참석했었다. 심지어 그들만의 신혼여행이었던 설악산 울산바위 암릉등반에도 함께 했다. 그만큼 나와는 절친했던 젊은 바위꾼 부부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탓이었다. 몇 년전 아르헨티나의 아콩카구아 등정에 나섰다가 실종되어버린 말벡의 소식을 지리에게 알려야 되는 끔찍한 악역을 내가 떠맡게 된 것은.

“지리? 나, 산.” 나는 짐짓 쾌활한 음성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어머 산 오빠,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한 옥타브 높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 목젖이 급격히 메어오기 시작했다. “어, 나 잘 지내. 나는 잘 지내는데...” 말을 맺지 못한 내 목소리가 젖어버렸다. 여자의 직감으로 알아차려 버린 것일까? 수화기 저편의 지리는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의 가쁜 숨소리만이 나지막히 들려왔다. 그 침묵의 순간들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전화기를 한 손으로 꽈악 그러잡고 끄윽 끄윽 울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내 울음소리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랬을 뿐이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른 다음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미안해.” 지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해.”

산에 다니는 녀석들끼리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네가 내 가족들을 보살펴줘. 말벡을 먼저 보낸 나는 지리를 보살펴주려 애썼다. 그녀의 직장을 알아봐 주기도 했고 그녀의 이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리가 내게 부탁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나를 아콩카구아에 데려가 줘요.” 내가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 그녀는 서울을 버렸다. 지리산 자락의 산골마을에 자그마한 한옥을 하나 사서 아예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녀가 서울을 떠날 때 나는 울지 않았다. 지리는 눈썹 끝에 물방울들을 몇 개 매단 채 내 손을 오래도록 꼭 쥐고 눈을 맞추어 주었다. 나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약속했다. 너를 꼭 아콩카구아에 데려가 줄께. 지리는 애써 웃는 낯으로 차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지리산에 오거든 우리 집에도 꼭 들러줘요. 기다릴께요.”

지난 여름, 나는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종주하는 내내 나는 무거운 와인병을 두 개나 짊어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가면 지리의 작은 집에 들르기 위해서다. 그녀의 집은 아담하고 낡았으며 쓸쓸했다. 때 이른 장마비가 처마 끝의 슬레이트 지붕을 마구 두드리는 여름밤이었다. 그때 내가 꺼내 놓은 와인이 바로 말벡(malbec)이다. “아콩카구아는 안데스에 있지?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 그 물로 키워낸 포도나무가 바로 말벡이야.” 나는 지리의 와인잔에다 말벡을 가득 따랐다. 지리는 그녀의 텃밭에서 키운 오이와 당근 그리고 상추 따위로 샐러드를 만들어서 내놓았다. 우리는 말벡을 한 잔씩 마셨다. 그의 부고를 전할 때처럼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 들어찼다. 격렬한 장마비 소리마저 현실 저 켠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묵묵히 한잔을 다 비워낸 지리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와인, 흙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만년설에 적셔진 흙내음.”

[img2]

말벡(malbec)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이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천대 받던 품종이다. 전형적인 보르도 타입 와인이란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축으로 하여 여러 가지 품종을 블렌딩한 것인데, 말벡은 그야말로 ‘조미료’ 수준으로 첨가될 뿐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골격을 구성하고, 메를로는 거기에 살을 붙이고, 카베르네 프랑이 견고함을 더해주면, 프티 베르도가 산도(酸度)를 높여주는데, 고작해야 1% 정도가 섞일 뿐인 말벡이 하는 일이란 색깔을 조금 진하게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말벡은 안데스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진출하면서 단역 배우에서 주연 배우로 성큼 올라섰다. 대중적으로는 산타 루치아(Santa Lucia)나 발보(Balbo)가 유명하지만 말벡의 진수를 보여주는 와인은 알타 비스타(Alta Vista)이다.

헬로 말벡, 잘 지내고 있지? 망할 자식, 만년설로 아예 이불을 해 덮고 누웠으니 늙지도 않겠구나. 여긴 뭐 언제나 그렇듯이 그저 그렇다. 엊그제도 산에 갔었는데 눈 덮힌 선인봉과 인수봉은 여전히 멋지더구나. 생각해보면 너와 함께 바위 하던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던 거 같다. 지리 역시 예전 그대로 의연하니까 가슴앓이 안해도 된다. 네 이름을 딴 와인, 참 맘에 든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 아니 뜨거운 사내의 붉은 심장, 잔뜩 꾸민 도회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산밑 마을의 흙냄새가 꼭 네 놈을 빼다 박았구나. 네 놈이 그립다. 올겨울에도 지리산에 눈이 덮히면 말벡 몇 병을 배낭에 넣고 그 산을 가로질러 가야겠다. 머지않아 우리가 만나게 될 그날을 위해 건배.

일러스트 오현숙

[무비위크] 2006년 12월 18일

이미경

2006.12.13 03:38
*.77.224.35
좀 웃긴 얘기지만, 예전에 선생님하고 언니들이랑 북한산 그 바위덩어리를 맨 손으로 기어오를 때, 정말 무서웠어요. 선생님의 그 등산이란 말에 속아 어쩔 수 없이 그 어마어마한 바위덩어리를 죽지 않기위해 기어 올랐지만,지금은 절대 못 할 것 같아요. 그 바위덩어리를 기어 오르는 일은 아이를 낳는 공포보다 더 심해요. 그제 설악산 바위덩어리를 케이블카를 타고 보았는 데..., 아름답기를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지만, 증말 무서웠어요.
선생님 소식을 여기서 듣기 전까지는 바위덩어리를 오르는 선생님이 부디 건강 하시기를 빌었다면 믿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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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12.13 03:45
*.241.46.113
하하하 미경, 나는 바위에서 추락사할만큼 빼어나거나 무모한 클라이머가 못 돼...
걱정 안해도 돼...^^

유서애

2006.12.13 16:25
*.106.133.188
제가 다 눈물납니다... 일러스트 멋집니다... 글과 그림이 완전 맞춤형이네요.

한수련

2006.12.13 16:31
*.210.166.97
왜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울컥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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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12.13 16:32
*.237.81.117
수련,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김유진

2006.12.13 17:17
*.126.20.97
작가의 글맛이란 이런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요.

민다혜

2006.12.13 17:24
*.243.40.128
음..슬프네요..

김지명

2006.12.14 09:48
*.9.134.140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 란 느낌을 처음 받아 본 적이 바로 진한 사내들의 우정을 가슴으로 느꼈을 때 였습니다 ..
살짝 샘도 나지만 그들의 것이었을 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끝이 찡했습니다 .. 논픽션이든 아니든 그 우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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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12.14 11:45
*.131.158.75
지명, 이 이야긴 연대기(?)에 못 들어가서 어쩌지...?^^

김지명

2006.12.18 11:35
*.9.134.140
어쩌죠 ? ^&^ 5 편을 기대해 볼께요 .. 벌써 바닥나신 건 아니시죠 ? 실망할지도 몰라요 ~~
profile

심산

2006.12.19 02:41
*.210.166.97
파랑새, 걱정마...전세계의 포도 품종 숫자를 다 합쳐도 어림도 없으니까.....^^

양윤희

2006.12.19 14:19
*.207.69.32
이게 바로 그 무xx크에서 읽었던 글이네요. 앞으로 계속 즐겁게 읽도록 하겠습니다.. 심산선생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해서 웬지 웃음이 났습니다~

김지명

2006.12.19 16:04
*.9.134.140
그 말입니다 .. 와인반 강의 말이죠 .. 야매강의 없어요 ?ㅋㅋ
아니 혹시나 해서 .. 저같이 시간 및 금전에서 쪼달림이 있을때 스팟으로 옹골차게 들을 수 있는
야매반 없나 해서요 ~ 저도 그 무궁무진한 와인의 매력에 풍덩 빠져보고 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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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12.19 18:56
*.210.166.97
흠, 양윤희님, 그렇다면 말벡으로 모실까요...?^^
지명, 지금 이미 와인반은 파산 지경(!)으로 가고 있어...다들 어찌나 마셔대는지 원...ㅠㅠ
그런데 야매반까지 만들라구? 차라리 날 죽여라...^^

이시연

2006.12.20 00:40
*.59.67.88
감동, 그 자쳅니다. 게다가 그 옆에 일러스트까지!
아래의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네요, 선생님!
흙냄새나는 와인이라...

권순미

2007.06.05 16:24
*.134.52.201
이 글이 젤로 좋아요.. 알타비스타 그랑리저브 말벡도 꽤 좋죠...... 산그림이 그려진 레이블이 좋더라구요. 빌라몬테스. 몬테스... 알라모스...^^;
profile

심산

2007.06.05 17:29
*.51.163.9
하하하 순미씨...여하튼 산쟁이들은 못 말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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