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28 15:48:11 IP ADRESS: *.241.4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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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늙어가는 할머니
일레인 메이(Elaine May, 1932-    )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자 이게 웬 횡재냐 하며 홍보에 더욱 박차를 가했던 두편의 정치영화가 있다. [왝 더 독](1997)과 [프라이머리 컬러스]. 두편 다 오스카 각색상 후보에 올랐을 만큼 수준 높은 하이코미디였는데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후자의 작가 크레딧이다. 아니 일레인 메이라고? 이 메이가 그 메이야? 확인해본 결과 틀림없는 그 메이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언이었으며 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이자 감독이었으나 80년대의 흥행참패로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던 일레인 메이. 그녀가 이제 고희를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되어 또다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돌아보면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10대 시절에 이미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첫딸을 17살 때 낳은 대책없는 여자가 일레인 메이다. 뒤늦게서야 정신차리고 가까스로 진학한 시카고대학에서 그녀는 평생의 친구를 만난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코미디언 지망생이었으나 훗날 영화감독으로 크게 성공한 마이크 니콜스이다. 그들은 대학졸업 뒤 정치풍자 코미디그룹이었던 [컴파스 플레이어스](1955~57)에서 다시 만나 듀오-코미디팀을 결성한 다음 브로드웨이로 진출한다.

그들의 재능을 만천하에 떨친 것은 [니콜스와 메이와 함께 이 밤을](1960~61)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 연일 매진을 기록했던 최고의 공연이었지만 그들은 인기의 절정기에 돌연 고별쇼를 벌이고는 각자의 길을 간다. 코미디언만으로 만족하기에는 각자의 예술적 야심들이 너무 컸던 것이다. 마이크 니콜스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1966)로 화려하게 감독데뷔를 할 즈음 일레인 메이는 팔리지 않는 희곡작품의 집필에 몰두하고 [루브](1967)나 [엔터 래핑](1967) 같은 영화에 출연하며 기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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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오토 프레밍거의 블랙코미디 [좋은 친구들].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는 덩달아 바람을 피우는 아내 역으로 제니퍼 오닐이 출연했다. 감독데뷔작 [새 잎사귀]에서는 일레인 메이가 직접 멍청한 대신 재산이 많아 죽이기에 안성맞춤(!)인 것처럼 보이는 여주인공 역을 맡아 의뭉스럽고도 코믹한 연기를 선보인다.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공인받은 것은 닐 사이먼의 시나리오를 연출한 [갈등의 부부](1972). 미숙하고 철없던 엄마노릇에 대한 보상심리의 표현이었을까? 메이는 이 영화에 자신의 딸 지니 벌린을 출연시켜 여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오르게 하며 기염을 토한다.

[마이키와 니키]는 마피아들의 세계를 코믹터치로 그려 누아르 장르를 비웃은 소품. 존 카사베츠와 피터 포크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웃음을 자아낸다. 코미디-판타지라는 독특한 장르로 분류되는 [천국의 사도]는 절정기에 오른 메이의 작가적 역량을 마음껏 뽐낸 작품. 워런 비티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았는데 [레즈](1981)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솜씨가 결코 녹록지 않다. 엄청난 흥행수입을 올렸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을 정도로 비평가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수작이다.

메이에게는 아무래도 절정의 순간에 물러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감각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천국의 사도] 이후 시나리오 집필 의뢰가 빗발쳤으나 메이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는 9년간의 칩거를 마치고 할리우드로 복귀한 작품이 [더스틴 호프만의 탈출]. 그러나 대부분 중동지역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 대참패를 기록하여 현재까지도 종종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1980)이나 케빈 코스트너의 [워터월드](1995)에 비견되곤 하는 치욕을 겪는다.

그뒤로 메이는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다. 그녀의 은퇴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러므로 메이가 잠적 9년 만에 40년지기 마이크 니콜스와 다시 손을 맞잡고 [버드케이지]로 컴백했을 때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내용도 첨단을 달리는 것이어서 동성애자 부부와 보수극우정치인을 대비시킨 경쾌한 코미디이자 은근한 정치풍자극이었다. 곧이어 [프라이머리 컬러스]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입을 다물고 기립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승리를 이룩해낸 자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다. 이 두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원숙한 정치의식과 경쾌한 풍자정신에는 곧 그녀가 헤쳐온 파란만장한 삶의 연륜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일레인 메이처럼 멋지게 늙어가는 할머니를 따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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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1년 오토 프레밍거의 [좋은 친구들](Such Good Friends)
1971년 일레인 메이의 [새 잎사귀](A New Leaf)
1976년 일레인 메이의 [마이키와 니키](Mikey and Nicky)
1978년 벅 헨리.워런 비티의 [천국의 사도](Heaven Can Wait) ⓥ
1987년 일레인 메이의 [더스틴 호프만의 탈출](Ishtar)  ⓥ
1996년 마이크 니콜스의 [버드케이지](The Birdcage) ⓥ
1998년 마이크 니콜스의 [프라이머리 컬러스](Primary Colors)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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