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8-29 20:58:52 IP ADRESS: *.215.2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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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작가의 멋진 복수극
월터 번스틴(Walter Bernstein, 1919-    )

컴퓨터의 오류로 출격명령을 받은 핵전투기가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간다. 미국의 군수뇌부는 물론이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잘못된 명령이라고 랬지만 전투기 조종사는 듣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소련 역시 핵전투기를 대거 출격시킨다. 이제 지구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라고? 정답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정답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시드니 루멧의 [페일 세이프]이다. 이 두 작품은 동일한 원작(1962년에 유진 버딕이 발표한 악몽 같은 플롯의 장편소설)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큐브릭의 블랙코미디와 루멧의 정통 드라마를 비교해 보는 것은 각색을 공부하는 시나리오 작가(지망생)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과제가 된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스티븐 프리어즈의 [페일 세이프](2000)는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생방송 영화’라는 것인데, 방송국 스튜디오에 몇 개의 세트를 지어놓고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즉석에서 편집하여 공중파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그 복잡한 과정들을 단 한 번의 NG도 없이 해치웠다는 사실은 분명 경탄할만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오리지널보다는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이 서커스 같은 이벤트를 지켜보면서 월터 번스틴(Walter Bernstein)을 생각했다. 여든이라는 나이에 자신의 작품이 새롭게 리메이크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순탄치 못했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노작가에게는 그보다 더 멋진 보상이 있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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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틴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뉴요커》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2차대전을 맞자 미군 참전용사들을 위한 주간지 《양크》의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데뷔작은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필름누아르 [당신의 키스로 내 손의 피를 씻어주오]이다. 2차 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전쟁포로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번스틴은 더 이상 일거리를 얻지 못한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10년이 넘도록 영화판 밖을 떠돌며 쓰라린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두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 함께 고생했던 배우들과 함께 우디 앨런을 등장시킨 [프론트]와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 [캐롤 스트리트에 있던 집]이다. 두 편 다 매우 훌륭하여 현실의 폭력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자 예술적 복수로서 부족함이 없다.

번스턴의 할리우드 복귀작인 [그런 류의 여자]는 소피아 로렌이 신비하면서 치명적인 여인으로 등장하는 전쟁영화. 이후 그녀는 [헬러 인 핑크 타이트]를 거쳐 [스캔들]까지 연속해서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번스틴의 시나리오들 중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은 [전쟁과 사랑]이다. 데뷔작의 히어로였던 버트 랭커스터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돕는 기차 기관사로, 폴 스코필드가 미술품을 밀반출하려는 독일군 장교로,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프랑스 여인으로 잔 모로가 등장하는 미-영-프 3국 합작영화다. [몰리 맥과이어]는 펜실바이나의 탄광촌을 무대로 펼쳐지는 노동운동을 다룬 정통 사회물로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었지만 흥행에서는 참패를 기록했다.

번스틴이 환갑이 지난 노년의 파트너로 마이클 리치를 택한 것이 혹시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이클 리치 역시 한때는 시드니 루멧이나 마틴 리트와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좌파감독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만 리치와 번스틴이 함께 만든 후기의 작품들은 풍자의 칼날이 무뎌져 가볍고 산만한 코미디에 그쳐버린 범작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번스틴도 늙어가면서 기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동조자이자 밀고자였던 엘리아 카잔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려 할 때 가장 서슬 푸르고도 완강하게 반대운동을 펼쳤던 작가가 바로 월터 번스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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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48년 노먼 포스터의 [당신의 키스로 내 손의 피를 씻어주오](Kiss the Blood off my Hand)
1959년 시드니 루멧의 [그런 류의 여자](That Kind of Woman)
1960년 조지 큐커의 [헬러 인 핑크 타이트](Heller in Pink Tight)
          마이클 커티스의 [스캔들](A Breath of Scandal)
1961년 마틴 리트의 [파리 블루스](Paris Blues)
1964년 시드니 루멧의 [페일 세이프](Fail-Safe)
1965년 존 프랑켄하이머의 [전쟁과 사랑](The Train)ⓥ
1970년 마틴 리트의 [몰리 맥과이어](Molly Maguire)
1976년 마틴 리트의 [프론트](The Front)ⓥ★
1977년 마이클 리치의 [우정의 마이애미](Semi-Tough)ⓥ
1979년 마이클 리치의 [못다한 사랑](An Almost Perfect Affair)ⓥ
1987년 마이클 리치의 [비밀의 목소리](The Cough Trip)ⓥ
1988년 피터 예이츠의 [캐롤 스트리트에 있던 집](The House of Carroll Street)
1989년 마이클 리치의 [탐정 플레치](Fletch Lives)ⓥ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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