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3-09 18:39:42 IP ADRESS: *.12.65.236

댓글

4

조회 수

3475

인연

임선경/방송작가, 인디라이터

대학 시절, 어떤 모임에서 처음 그를 본 순간!  빠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남아있는 ‘다’ ‘까’ 로 끝나는 말투, 진지한 표정으로 건네는 농담, 그리고....  정말로 알 수 없는 이유들.  

회원들끼리 수호천사를 만들었다. (20대 초중반들이었는데도 그런 놀이를 했다.) 무작위로 뽑은 쪽지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의 수호천사가 되었지만 막상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볼 때마다 가슴만 떨렸다. 어느 날, 후배와 서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후배는 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실망한 채 그냥 돌아서는데 그가 보였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러본 것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토요일 오후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렇게 시작했다. ‘인연’ 이거나 ‘운명’ 일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왜 첫눈에 반했으며 왜 그의 천사가 됐으며 왜 성실했던 후배는 그 날 나를 바람맞혔는가 말이다.   문제는 그가 그 일련의 사건을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은 했으되 짝사랑이었다. 폭풍 같은 나날들이었다. 황홀과 비탄을 넘나드는 롤러코스터를 탄 날들이었다.  2년이 지나서야 그 열차에서 내리고보니 발이 땅에 붙지 않는 듯 얼떨떨했다.

내가 ‘인연’ 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통렬하게 비웃는다. “여보게, 오늘 밤 ARW357 이라는 번호판을 단 차를 보았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수백만 개의 번호판 중에서 바로 그 번호판을 단 차량을 볼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

그렇군.  ‘인연’ 이나 ‘운명’ 으로 포장된 일이 알고 보면 그저 평범한 일이거나 사소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인연인 것이고 아니라면 또 아닌 것이다. 한 쪽은 인연이라고 믿고 다른 한 쪽은 우연이라고 여긴다면 그게 바로 불행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 이라는 말처럼 마음 편한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을 포기할 때, 관계를 끝낼 때 ‘인연이 아니었다’ 는 말만큼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말이 또 있을까? 반쪽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요,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요, 내가 살 이유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니었을 뿐.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만나는 동안에 우여곡절이 많았고 결혼한 지금에도 풍파가 많지만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우리가 인연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서로가 편하다. 부부는 그래야 사는 것이다.

월간 [방송작가] 2010년 3월호

profile

명로진

2010.03.10 11:03
*.192.162.179
잘 읽었습니다. ^^

'부부는 그래야 사는 것이다....'

수긍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ㅋㅋ
profile

윤석홍

2010.03.10 16:08
*.229.145.41
명로진 선생님, 새싹처럼 앙증맞은 책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나올 것 같은^^.
감사합니다.
profile

심산

2010.03.10 17:34
*.12.65.236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많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렇게 된 일들이...
profile

명로진

2010.03.11 16:11
*.192.162.221
아 윤석홍 선생님,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51 제대로 된 혁명 + 6 심산 2010-10-08 3497
50 예술을 하려면 뉴욕으로 가라 + 6 file 심산 2009-09-04 3478
» 인연 + 4 심산 2010-03-09 3475
48 간디학교 교장 양희규 인터뷰 심산 2006-05-02 3450
47 전국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확정 발표 + 9 심산 2007-02-07 3437
46 김대우의 맛집기행(8) 인생의 공포를 달래는 순대국 + 7 file 심산 2007-02-06 3408
45 북악산 숙정문 코스 + 1 file 심산 2006-03-25 3391
44 볼프강 귈리히 평전 [수직의 삶] + 2 file 심산 2006-06-21 3371
43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 + 3 file 심산 2010-08-02 3370
42 김대우의 맛집기행(최종회) 자장면은 인생을 타고 흐른다 + 8 file 심산 2007-03-01 3295
41 문화백수 5인의 자발적 문화백수론 심산 2006-03-11 3278
40 돈이란 무엇인가(하) + 18 심산 2007-11-24 3246
39 서울엔 문학 올레길이 있다 file 심산 2009-10-10 3242
38 서울성곽 나들이 안내 file 심산 2006-03-25 3174
37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심산 2006-03-10 3169
36 김대우의 맛집기행(7) 입을 다물게 하는 도가니찜의 힘 + 9 file 심산 2007-01-23 3153
35 보이지 않는 빚 + 6 심산 2009-12-05 3126
34 이건희, 삼성공화국의 제우스 + 3 file 심산 2008-05-24 3120
33 김대우의 맛집기행(3) 조선옥의 갈비 + 9 file 심산 2006-11-27 3115
32 더 사랑하기 위해 와인잔을 들어라 + 11 심산 2007-11-08 3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