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심산입니다. 제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는 인간일지라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모양입니다. 제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저를 사로잡고 있는 주제는 ‘시나리오의 생산과 유통’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주제를 보다 효율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까? 공적인 차원에서 저는 두 가지의 답안을 제출하였습니다. 하나는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의 창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의 개설이었습니다. 아직은 성기고 모난 면이 많이 눈에 띄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저마다 제 몫을 다 해내리라 믿습니다. 어여삐 여기시고 많이 도와주십시오.
위의 두 단체 혹은 제도와는 별도로, 사적인 차원에서 찾아낸 새로운 돌파구도 있습니다. 바로 ‘심산스쿨’의 설립입니다. 제가 ‘시나리오워크숍’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도 어언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심산스쿨은 제가 이끌어오던 기존의 시나리오워크숍을 보다 세분화 전문화시키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종의 ‘작가 에이전시’로서의 역할을 떠맡으려 합니다. 즉, 단순히 가르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를 발굴해내고, 그들을 한국영화계에 진출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 바로 [심산스쿨 시나리오작품집]의 출간과 보급입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인 이 책 [심산스쿨 시나리오작품집 2006]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 책의 출간은 이미 2005년 여름께 제가 이끌고 있는 ‘심산스쿨동문회’에 예고되었고, 그래서 6개월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투고된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나름대로 엄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선정된 것들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정된 작품들 중에는 당장에라도 영화화가 가능할 듯 보이는 것도 있고,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여 ‘작가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도 있습니다. 평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찌되었건 저희가 이 작품집의 준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는 사실만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김현중의 [악몽]은 호러적 터치가 돋보이는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과학적 증명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X파일 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미쳐가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비출 때에는 누아르적 정취가 물씬 풍기기도 하지만, 끝내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반전으로 관객의 허를 찌르는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작가인 김현중은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공모전에서 [고맙습니다]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현재 [고맙습니다]는 ‘영화사 봄’에서 제작준비 중에 있습니다.
조철환의 [질투대첩]은 엽기발랄한 슬랩스틱 블랙코미디입니다. 가당치 않은 질투 때문에 빚어진 어설픈 납치극이 엉뚱하게 발전해가면서 개성 만점의 캐릭터들이 엎치락 뒤치락 연출하는 코미디가 배꼽을 잡게 합니다. 모든 장면들이 치밀한 계산 하에 꽉 짜여져 있고, 그다지 많지 않은 비용으로도 제작이 가능하여, 여러 모로 매우 ‘경제적인’ 작품이 될 듯 합니다. 조철환은 개성이 뚜렷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가 여지껏 써왔던 다른 작품들도 대개 ‘엽기발랄 슬랩스틱 블랙코미디’라는 독특한 장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최관영의 [18살에 울다]는 사실적인 휴먼드라마입니다. 이 작품은 백주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동급생을 처참하게 살해한 한 고등학교 남학생의 내면세계와 주변환경을 냉정하게 동시에 따뜻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섣부르게 극화(dramatize)하거나 상업영화 특유의 과장된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그 진정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최관영이 여지껏 써온 다른 작품들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heart-warming)' 따뜻한 휴머니즘을 줄곧 확인해볼 수 있었습니다.
최예선의 [연애중독]은 전형적인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로서 섬뜩한 연애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너무도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두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를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격돌해가는 과정에서의 심리묘사와 비주얼(visual)이 일품입니다. 어떤 뜻에서 이 시나리오에는 멜로와 스릴러와 호러가 혼융(fusion)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최예선은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인데,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산스쿨 시나리오작품집 2006]에는 이상의 네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아직 기성작가들만큼의 세련된 완성도를 성취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신인작가들 특유의 패기와 개성들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과 그것을 쓴 작가들을 한국영화계에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작품들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되기만을 기원합니다. [심산스쿨 시나리오작품집]은 앞으로도 매년 새해 벽두에 출간될 것입니다. 내년에는 보다 완성도 높고 신선한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에 큰 성취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새해 벽두에
심산스쿨 대표
심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