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스쿨에 [강헌재즈반]을 개설합니다
2007년 12월 8일(토) 밤 7시 개강/수강신청 접수는 2007년 11월 1일부터
주말 저녁마다 재즈의 선율에 취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심산스쿨에 [강헌재즈반]을 개설합니다. [재즈반]에서는 도대체 뭘 하느냐고요? 발생 초기부터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당대의 명반들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올해 연말인 12월 첫째주부터 시작하는데, 매주 토요일 밤 7시부터 10시까지 총16회의 과정으로 진행되며, 수강료는 55만원(부가세 포함)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즈반의 수업방식은 이렇습니다. 각자 토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심산스쿨에 모입니다. 먼저 강사가 30분 정도 재즈의 역사에 대하여 썰(?)을 푼 다음 30분 정도는 당대의 명반을 감상합니다. 음악 감상시간에는 교실의 불을 끄는 게 제격이겠지요? 가능하다면 와인이라도 홀짝거리면서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심산스쿨에서 와인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수강생들 각자가 챙겨오는 거지요). 그 다음에는 다시 30분 강의, 30분 와인을 마시면서 재즈 감상, 그리고 또 다시 30분 강의를 듣고 뒷풀이를 겸해서 다시 늦은 밤까지 와인을 홀짝거리며 연속 재즈 감상! 어떻습니까, 아주 즐거운 워크숍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실제의 수업방식은 강헌이 정할 겁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수업을 진행할 지는 하느님 며느리도 모릅니다...^^
애당초 재즈반의 개설을 구상했을 때 제일 처음 떠오른 사람은 강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제외된 사람도 그였지요. 건강 문제 때문입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한때 우리 한량계(?)에 “강헌이 내일 모레 간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심지어는 “강헌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CBS FM 출연차 방송국에 갔다가 그와 마주쳤습니다. 건강이 소문보다 훨씬 더 좋아보였습니다. 술 담배를 끊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끔씩 의사의 허락(!) 하에, 와인을 한 두 잔 정도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심산스쿨에 와서 재즈반을 이끌어줘!” 강헌이 짧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지 뭐!” 그래서 현재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며칠 전 [심산와인반 3기]의 종강일날 그가 왔습니다. 심산스쿨의 AV시스템을 체크하기 위해서였지요. 빔 프로젝터를 보는 그의 눈빛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뭔가 맘에 안 드는 거지요. 오디오 시스템을 보더니 아예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이걸로는 재즈 못 듣겠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심산스쿨에는 록이나 팝송 따위를 듣는 앰프와 스피커가 따로 있고, 클래식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앰프와 스피커도 따로 있습니다. 제가 항변(?)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DENON 플레이어에 NAD 앰프에다가 BOSE 스피커가 어때서! 게다가 SIEMENS 앰프에다가 KLANGFILM이라는 빈티지 오디오까지 갖추어 놨는데!” 하지만 강헌은 완고합니다. "저런 걸로 들으면 재즈의 참맛을 느끼기 힘들어. 앰프는 내가 기증해줄게, 대신 스피커는 내가 지정해주는 걸로 네가 사서 따로 달아줘!"
심산스쿨에는 전문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항변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힘 없는 제가 당해야지요(ㅠㅠ). 강헌이 시키는대로 할 생각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천장과 칠판을 다 뜯어내고 새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자고 안해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ㅠㅠ). 어찌되었건 이런 과정을 거쳐 [강헌재즈반]이 개강하게 되었습니다. 강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줘서 참 고맙습니다. 그가 다른 술은 몰라도 와인 한 두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심산스쿨에 [강헌재즈반]을 개설할 수 있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강헌 같은 부류의 인간을 설명하기는 정말 힘듭니다. 아래의 글은 강헌이 직접 쓴 [강사소개]입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조만간 [강헌재즈반]의 배너를 만들어 알려드리겠습니다. 올겨울에 시작되는 [강헌재즈반]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img1]강헌이 강헌을 말하다
강헌(1962~ ) 무직. 몇 년 전 구청에 무슨 일로 가서 직업란에 ‘음악평론가’라고 써 넣었더니 창구의 여직원이 날 빤히 올려 보면서 자로 두 줄을 좍 긋더니 그 위에 ‘무직’이라고 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미 있기도 해서 “나, 그 짓으로 당신보다 몇 배는 더 버는 것 같은데?” 하고 시비를 붙였더니 바로 돌아오는 말, “내무부 규정에 없는 직업이에요.” 지금 행자부 시절에는 어쩐지 확인해 보지 않았다. 다만 그때 안 사실은 영화평론가는 ‘직업’인데 음악평론가는 직업 분류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그래도 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영화감독도 무직(!)이라는 사실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오기 전까지 자랐다. 평촌의 어느 역술가가 말한대로 도대체 뭐하는 자인지 알 수 없다는 어지러운 사주대로 살면서 단 한번도 갑근세를 내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수 씩이나 해서 들어갔더니 첫시간에 소설가나 시인이 될 놈은 학교 관두고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으로 가라는 소리를 듣고 김이 팍 샜다. 그럼 오기로라도 작가(作家)가 되어야 했을 터인데 그만 작가(酌家)로 전락하고 말았다.대학원을 음대로 간 것 또한 순간적인 충동을 참지 못해서였지 음악평론가가 되겠다는 의도가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년반 동안의 음대 생활은 지루했고, 나는 졸업하자마자 영화판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삼십대 초반까지 장산곶매라는 독립영화집단에서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불법(?)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결코 영화광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아니다. 그리고 왜 충무로가 아닌 그런 ‘빨갱이’ 영화 만드는 곳에 있었던 것도 내가 무슨 운동권이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영화판으로 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그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보다도 이 힘없는 청년들을 상대로 호들갑을 떠는 국가기관과 드잡이를 벌이는 것이 어쩜 더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90년대가 열리고 있었고 나는 영화를 하면서 <예감>, <상상>, <리뷰> 같은 문화잡지에 개입했다. 그러는 동시에 먹고 살기 위해 충무로나 TV드라마의 대본을 쓰기도 했고 16밀리에로 비디오 영화의 하룻밤짜리 대본도 썼다. <그녀의 숲은 늘 푸르다>던가? 뭐 그런. 노래를찾는사람들과 공연을 만들기도 했고 나와 정태춘을 무죄로 만든 사전심의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을 기념하는 <자유>라는 음악페스티벌을 만들기도 했다. 2001년에 들국화 트리뷰트 음반을 프로듀스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좋고도 나쁜 기억으로.그리고 대학에서 대중음악사를 강의했고, 그것은 지금도 이어진다. 아 참 물론 음악평론가, 그것도 한국 대중음악을 주로 다루는 음악평론가가 되었다. 십수종의 신문과 대여섯종의 주간지, 그리고 셀 수 없는 월간지 및 사보를 더렵혔다.
음악평론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그것도 김현식이 죽고 난 뒤 일주년이 되는 해였던가, 생전의 그와 가까웠던 과 후배(당시 스포츠신문 연예기자였다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는 육상효)가 그를 추모하는 책을 내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 평론 한 꼭지를 나에게 청탁하면서부터이다. 단지 내가 음악대학원을 나왔다는 이유로. 그리고 한국에 대중음악을 다루는 평론가가 없다는 이유로. 운동권 비슷한 신세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나는 그가 선금으로 내민 오십만원의 원고료에 무력하게 무너졌고, 책이 나오자 나는 어느새 음악평론가가 되어 있었다. 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빈 틈이 많은 구조이다.
하도 술을 마셔대는 날 보고 대학시절 나랑 오년을 넘게 살았던 선배는 나에게 농담으로 마흔 이후 인생은 설계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되었다. 마흔 두 살이 되던 해 나는 대동맥 박리라는 심각한 사태를 맞이했고 집도의는 수술을 포기하고 대기실의 가족들에게 가망이 없으니 장례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사망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진 삼주간의 혼수상태. 그리고 의사 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와인 잔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관대한 시선으로 살아간다. 그 어지러운 동안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이 있었고 두 아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결혼한 전처가 독일로 데려갔다. 평생을 방탕하게 산 겁벌이다. 근 이십여년을 함께 지내온 오디오와 만오천장의 음반만이 이제 내 옆에 남았다. 이들이 없는 나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오디오와 LP, 이것이 내 삶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전라남도 담양에 살고 있다. 와호장룡 같이 멋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대숲이 둘러싸고 있는 집에서 난생 처음 고요함을 접하고 있는 중이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담양에 묻히고 싶다.
추신) 나를 당혹하게 하는 유이(唯二)한 질문은 무슨 음악을 좋아하냐는 물음과 책 쓴 게 뭐냐는 물음이다. 앞의 것은 너무 많아서, 뒤에 것은 하나도 없어서 곤혹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