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즐겨라
심산이 흠모하는 산악인 이본 취나드의 새로운 저서
누군가를 흠모한다는 것은, 사춘기 소녀나 자의식 과잉의 청년에게는 어울리는 일일지 모르나, 저처럼 ‘닳고 닳은’ 중년의 사내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짓입니다. 제게도 젊은 시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흠모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뭐 니체, 레닌, 김일성, 게바라,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지요. 한때는 보르헤스나 쿤데라 혹은 딜런 같은 예술가들에게 경도된 적도 있었고, 엉뚱하게도 메스너나 귈리히 같은 산악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도 있지요. 하지만 이제는 가슴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결코 존경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쓸쓸한 깨달음(!)을 얻은 거지요. 어쩌면 이미 늙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설적인 이유로, 살아가다가 이따금씩 마주치게 되는 ‘멋진 인간들’을 보면 가슴이 뜁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용감한 사람, 유능하고 품위 있고 겸허한 사람. 믿기 어려울 테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 1938- )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겠군요. 저는 그와 직접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연히 그의 삶을 넌짓 엿보고 가슴 속으로부터 ‘흠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진 인간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지난 2006년 한 해 동안 저는 [한국일보]에 ‘심산의 산과 사람’이라는 1면 짜리 에세이를 연재했습니다. 모두 43명의 산악인들을 다뤘는데, 제일 마지막 회는 ‘무명의 가이드들’에게 바치는 글이었으니, 42번째 산악인이 최후의 인물이었던 바, 그가 바로 이본 취나드였지요. 그런데 올해 초의 일입니다. 미국에 거주하시는 원로 산악인 선우중옥 선생님(이 분과도 역시 일면식도 없습니다)이 뜬금없이 국제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심산씨? 나 선우중옥이야.” 저는 너무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이 내 친구 취나드를 너무 정확하게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전화했어.” 선우중옥 선생님과 이본 취나드의 국경을 넘은 우정은 산악계에서 오래 전부터 ‘일종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취나드한테 당신 글을 읽어줬더니 아주 좋아하더군. 언제 캘리포니아로 날라와. 취나드가 자기랑 함께 요세미티에 가서 등반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집에서 캘리포니아 와인과 함께 저녁이나 먹자고 하더라구.”
[img7]엊그제, 이본 취나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가슴 설레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심산스쿨에 나와보니 우편물이 하나 배달되어 있었습니다. 겉봉을 뜯어보니, 이본 취나드의 새로운 저서가 들어 있었는데, 첫장을 열어보니 그의 친필 싸인이 들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그에게 싸인을 부탁했을 선우중옥 선생님의 싸인도 그 밑에 나란히 쓰여 있었습니다. 아아 어찌나 황홀하고 감사했는지. 산악인들이라면 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이 두 클라이머가 얼마나 ‘위대한 선배님’들이고, 그래서 그분들이 직접 싸인한 저서를 받아든 풋내기 후배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겠는지.
정작 놀라운 변화는 그의 새 저서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원제 Let My People Go Surfing, 화산문화, 2007)을 읽을 때 생겨났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책은 이본 취나드의 짤막한 자서전이자 그의 세계적인 등반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Patagonia)사의 경영철학서입니다. 그런데, 읽는 내내, 가슴이 뛰고 아렸습니다. 이토록 멋지게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구나, 이토록 성실한 삶도 가능하구나, 이토록 품위 있는 회사가 성공할 수도 있구나! 모처럼 오랜만에 나 자신을 뒤돌아보고, 부끄러워하고, 새로운 결심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본 취나드와 그의 자랑스러운 회사 파타고니아 그리고 그곳의 동료들 이야기를 하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듯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여러분, 모두들 시간을 내어서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이본 취나드의 새 저서를 읽어보세요.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래는 이미 발표된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은 저의 [한국일보] 연재에세이 ‘심산의 산과 사람’ 제42회에 실렸던 것이고, 두 번째 글은 [오마이뉴스]의 이현상 기자가 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의 서평입니다. 이본 취나드라는 걸출한 인물을 대략적으로 파악하시는 데 약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쓴 글의 박스기사에서 [빙벽등반]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라고 기술한 것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오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글이 '오보'가 되어서 저는 무한히 기쁩니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42) 이본 취나드(1938- )
[img2]인수봉 ‘취나드길’의 주인공 마음 가난한 억만장자
“수학공식 외우던 시간이 가장 아까워”
고교중퇴 후 등반에 ‘올인’한 암벽 천재
주한미군 시절 선우중옥과 인수봉 올라
등반장비·의류 회사 설립해 사업도 성공
연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자료를 찾아 리스트 업을 해놓은 산악인들의 숫자는 엄청난데, 한국의 산악인들에 대해서는 아직 말문도 트지 못했는데, 연말은 다가오고 연재는 마무리되어야 한다. 나는 내 집필실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리스트들을 들여다보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누가 어느 산에 올랐는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가장 인상적인 산악인인가? 누가 가장 성공적인 등반과 삶을 꾸려왔는가? 나는 자료 따위들을 모두 무시하고 내 마음 속을 깊이 들여다본다. 네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악인은 누구인가? 과묵하고 겸손한 사나이 이본 취나드(68)가 떠오르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본 취나드는 이미 ‘전설 속의 인물’이다. 우리 세대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바위질(!)을 하러다니던 ‘중딩’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나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낡은 배낭의 브랜드가 ‘취나드’였다. 어린 눈에는 너무도 거대해 보였던 인수봉 앞에 서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 ‘못된 선배’들이 멋지게 뇌까려주곤 했던 판에 박힌 대사들이 있다. “저 벽이 보여? 저 벽으로 나 있는 저 멋진 등반 선이 보여? 저게 바로 ‘취나드길’이야. 잘 보면 두 갈래가 있어, 취나드A와 취나드B. 지금 너네들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고, 나중에 ‘대가리’ 크면 한번씩들 붙어봐. 오금이 저릴만큼 멋진 길이야.”
[img3]세월이 흘러 결국 취나드길을 완등하고 났을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전설 속의 인물’이 펼쳐보였다는 무용담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주한미군이었대. 어느날, 한국 최고의 바위꾼 선우중옥 선배를 찾아와 함께 바위를 하자고 그랬다는데,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이 ‘당대 최고의 바위 천재’들이 이 길을 개척할 때 며칠이나 걸렸을 거 같애? 딱 하루야. 온사이트(아무런 정보도 없이 처음 접한 바위벽을 오르는 것)로 한방에 끝내버렸다구.” 맙소사, 이십대의 팔팔한 청춘인 내가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온몸으로 진땀을 흘리며 거의 죽기살기로 올라온 이 길을 온사이트로 올랐다구? 그것도 장비도 변변치 못했던 1963년에? 바위에 미쳐 사는 청춘의 가슴 속에서라면 이제 그 ‘전설 속의 인물’은 이미 신(神)의 경지에 올라서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서 알게 되는 이본 취나드라는 인물은 더욱 더 매력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등반의류 브랜드는 ‘파타고니아’이다. 전세계에서 공히 최고의 브랜드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 파타고니아의 창립자이며 현재의 회장이 바로 이본 취나드란다. 매출액 규모로 봐도 이미 억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사람인데,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방식은 더 없이 소박하기만 하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본 취나드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그는 아직도 1960년대에 만들어진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주워온 조개들로 끓이는 조개탕이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것은 등반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이본 취나드는 부탄 히말라야의 6,000m급 산을 초등했다. 하지만 그는 등반 직후 자신이 작성한 루트 개념도를 찢어버리고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음에 오는 사람도 초등자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이 점에서 그는 “네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말라”던 게리 헤밍과 상통한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세계적인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가난하고 자유로운 히피로 남아있는 셈이다.
이본 취나드의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민자이다.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전까지 프랑스어를 더듬거렸을 뿐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덕분에 미국의 초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는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특수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규교육에서 어떠한 흥미로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그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고 만다. 그가 원했던 일이란 물론 클라이밍이다. 해외의 경제 전문지들은 때때로 그를 가리켜 “가장 크게 성공한 고교 중퇴자”라는 식의 인터뷰를 싣곤 하는데, 정작 이본 취나드는 매우 담담하게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학교에서는 그것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아까웠던 시간은 학교에서 수학공식을 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뜻에서 홈스쿨링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이들 역시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집에서 저 홀로 공부하며 컸다고 한다. 이본 취나드라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일년치 연재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왜 그를 가장 매력적인 산악인이자 존경할만한 인간이라고 여기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본 취나드는 자연인이다. “클라이밍하는 농부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들은 클라이밍할 필요를 못느낍니다. 대지에 뿌리박고 있으니까요.” 그는 세간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그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사람이다. “저는 바위나 설산과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테니스를 즐기지만 누구와도 시합은 안 합니다. 대신 저의 장비와 등반기술 그리고 라켓 휘두르는 법에 집중할 뿐이지요.” 그가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img4]“등반은 쉽지만 글쓰기는 어려워”
7년 걸려 ‘빙벽등반’ 내고 소감
장비 만들며 장비의 발전엔 부정적
이본 취나드는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암벽등반에 몰두하여 당대 최고의 루트들을 개척했다. 이들 중 등반사에 아로새겨진 것은 요세미티의 노스 아메리카 월 초등기록과 해머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 노즈 초등기록이다. 그는 이 당시부터 이미 스스로 장비를 만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장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결국 ‘취나드’라는 이름의 장비회사를 차려서 성공의 기초를 닦았다. 현재의 회사명은 ‘그레이트 퍼시픽’이다.
그는 스스로 장비를 만들면서도 그것의 발전이 등반의 자유를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요즘은 암벽화의 기능이 너무 좋아져서 5.7급의 실력 밖에 갖추지 못한 사람이 5.10급의 바위벽을 수월하게 올라갑니다. 결코 자랑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오히려 등반의 자유와 기쁨을 반감시키게 되는 거지요.”
이본 취나드는 모든 종류의 등반형태를 마스터했는데, 특히 빙벽등반 분야에서는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이룩하여 따로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빙벽등반>인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이다. “등반은 쉽지만 글쓰기는 어려워요. 7년 동안이나 이 책 하나에 매달렸는데 다시는 안 쓸 겁니다. 글쓰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여하기에는 삶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모험을 즐기기에도 삶은 너무 짧습니다."
[한국일보] 2006년 12월 20일
대기업 사주, 급진적 환경혁명가 되다
첫째, 한심한 주한미군 1960년대 초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주둔한 미국 청년이 있었다. 징집영장을 받아든 청년은 간장을 병째 마시며 징병을 피해보려 했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으로 보내졌다. 상관에 대한 경례는 고사하고 바락바락 대들기 일쑤며, 복장은 늘 불량하다 못해 툭하면 단식투쟁까지 벌이던 '고문관'은 결국 변압기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보직으로 발령받는다. 도대체 이 한심한 주한미군은 제대로 인생을 살아갔을까?
둘째, 세계적인 등반가 북한산 인수봉에는 취나드길이 있다. 거대한 크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대 난이도는 5.10b에 이른다. 5.10b라면 체계적인 교육과 1~2년 이상의 전문적인 훈련이 있어야 등반이 가능한 암벽 난이도에 해당된다. 더구나 취나드길은 그 길이가 177m에 이르는 곳으로서 난이도에 비해 제법 용기가 필요한 등반루트다. 이 루트를 개척한 사람은 미국인 등반가였다. 전문적인 장비가 거의 없던 시절, 암벽화도 없이 이 길을 한나절 만에 개척하였다. 그는 청년 시절 요세미티에서 가장 모험적인 등반을 주도하며 거벽등반의 새로운 장을 열더니 곧 알프스로 넘어가 빙벽등반의 고수가 되었다. 이 세계적인 클라이머는 누구인가?
셋째, 세계적인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사주 파타고니아(Patagonia).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쪽 지대를 부르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 명칭이기도 하다. 파타고니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파타고니아의 경영철학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함께 얻는 것이다. 그래서 파타고니아의 상표는 낡을수록 가치가 돋보인다. 일례로 2005년 일본 e-bay에는 파타고니아사의 1980년 재킷이 4000불에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세계적인 브랜드의 사장은 어떤 사람일까?
넷째, 급진적인 환경운동가 이윤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자본주의. 그 심장 미국에서 기업을 경영하며 환경운동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업이라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고,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없는 이들에게서 빼앗아 있는 이들을 배불리고, 공장폐기물로 지구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과격한 좌파 활동가의 격문 같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다소 극적인 위 4가지 캐릭터는 모두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그의 이름은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
또 하나의 역겨운 CEO 자서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은 이본 취나드의 자서전이자 그의 경영 철학, 환경 철학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운 좋게 성공한 기업의 CEO들이 의례 펴내는 자서전쯤으로 알면 오해다. 대형서점의 진열대에 즐비한 그 많은 경영철학서들이 사실 그들의 성공담을 세련되게 자랑하고 있을 뿐 '철학'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img5]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들이나 산으로 쏘다니길 좋아하던 소년 이본 취나드. 엘리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얼뜨기에 불과하던 이본 취나드는 아직도 수학공식을 외우던 시간이 가장 아깝다고 회상한다.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10대 후반부터 요세미티에서 움막 생활을 하며 암벽등반에 빠져든다. 제대로 된 장비가 없던 시절, 그는 손수 대장장이가 되어 쇠붙이를 녹이고 두들겨 자신이 사용할 암벽등반 장비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때 만들기 시작한 피톤은 당시 암벽 등반가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되었고, 결국 '취나드'라는 이름으로 암벽 장비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진 무슨 사업이라고 하기에는 형편없었다. 그저 자신이 사용할 장비를 만들면서 서너 개 더 만들어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파는 식이었으니 밥값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위에 목숨을 걸어본 사람이면 안다. 잘못된 장비 하나가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허구한 날 요세미티에 살며, 혁신적인 등반방식으로 거벽등반을 시도하던 이본 취나드가 만든 장비들은 많은 등반가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본 취나드는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곧 자신의 피톤 제작을 중단한다. 강철로 만들어진 피톤은 너무 단단해 바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사업가이기 전에 등반가였고, 등반가이기 전에 '마땅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환경운동가였던 것이다.
바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용가능한 등반장비를 고안하고 생산하던 이본 취나드는 '취나드'라는 브랜드로 본격적으로 등반장비를 생산해냈다. 그래봐야 주위의 등반 동료들과 그의 '대장간'을 조금 늘린 격이었다. 뒷마당 대장간에서 시작된 신화는 이후 '취나드'를 거쳐 현재는 전 세계 클라이머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인 '블랙다이아몬드'로 이어진다.
환경 철학이 경영철학을 지배한다
이본 취나드는 아웃도어 의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후 자신의 혁신적인 등반방식처럼 아웃도어 의류에서도 혁신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가령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석유로 만든 화학섬유가 오히려 면제품보다 친환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목화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산림을 베어내야하고, 방독면을 써야할 정도의 농약을 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과감하게 파타고니아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인 면 의류 생산을 중지하기에 이르렀으며, 전 세계를 수배한 끝에 유기농 목화밭에서 수거한 순면만을 사용하여 제한적으로 면의류를 생산하고 있다. 화학섬유는 당연히 재생 가능한 제품이며, 화학섬유제품은 PET병을 수거하여 재생산한 옷감을 사용한다.
이본 취나드의 환경 철학은 기업의 경영철학을 지배한다. 그는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수준의 성장률을 5%로 설정하였고 그 이상의 성장을 절제하고 있다. 파타고니아의 웹사이트에는 항상 당면한 '환경보호를 위한 행동지침(Environmental Activism)'이 게재되어 있다. 단순히 환경이 중요하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마나한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해야할(What We Do)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또 기업 차원에서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본 취나드의 파타고니아는 총 매출의 1%를 환경운동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이익의 1%가 아니라 매출의 1%이므로 적자가 나도 내야한다. 파타고니아는 여느 대기업처럼 주식회사나 유한회사가 아닌 이본 취나드의 개인 회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본 취나드는 사회적, 환경적 책임에 제한을 두는 유한회사나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극한적인 환경파괴를 일삼는 기업을 혐오하므로 자신의 환경 철학, 경영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본 취나드는 파타고니아의 환경 철학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제대로 알아보며 살자 ▲자신의 행동부터 정화한다 ▲참회하라 ▲시민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다른 기업들을 일깨운다. 그는 1% 기부 캠페인이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서 사업을 경영하는 자의 최소한의 '참회'라고 주장한다.
[img6]이 시대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책
이 책의 원 제목은 'Let my people go surfing'이다. 즉 내 사람들, 직원들을 서핑을 하게 하라는 뜻이다. 그는 파타고니아의 직원들이 파도가 칠 때는 근무를 때려치우고 언제든지 서핑을 할 수 있도록 자유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본사에는 1984년 이미 어린이집을 설립돼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회사의 트레이드마크 음향이 되었다. 이렇다보니 젊은 인재들이 파타고니아를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의 하나로 손꼽는 것은 당연하다. 또 임신과 육아 때문에 숙련된 고급인력이 빠져나가지 않으므로 회사 입장에서도 이익이다. 이본 취나드의 주장과 실제 그의 경영경험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여성들의 출산율 저하 등 재앙에 가까운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이란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건 교과서 아니야? 그러나 전문등반을 즐기는 클라이머와 아웃도어를 사랑하는 모든 자연주의자들, 전 지구적인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환경운동가들과 그 동조자들,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들과 기업 경영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청년들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인 것이다.
[오마이뉴스] 2007년 4월 2일
선생님을 알수록 선생님 이름을 '산'이라 지은게 참 잘지은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