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한 친구
나의 휴대용 재떨이 ABITAX 4301 BLUE를 찬양함
여러분께서는 30년 동안을 거의 매일 함께 지낸 친구가 있습니까? 아무리 베프(BEST FRIEND)라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제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니고, 일종의 등산 혹은 여행 용품인데, 일본에서 만든 ABITAX 4301 BLUE가 그런 친구입니다. 한일 간의 관계가 나빠져서(실상은 일본의 일방적 잘못이지요) BOYCOTT JAPAN운동이 여전히 진행 중인데,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서 미안합니다만,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이 친구와의 30년 인연을 기려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의 첫 번째 일본여행은 199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한창 충무로의 신예 시나리오작가(당시의 영화잡지 [SCREEN]에서는 ‘현재 촉망 받는 시나리오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4명의 신예작가들을 소개했는데, 그렇게 꼽힌 이들이 저와 공지영(소설가) 그리고 노효정(시나리오작가/감독)과 강제규(시나리오작가/감독)였습니다)로 주목 받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일본여행은 [홀리데이](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유명한 탈옥범 지강헌 사건을 모티브로 삼음)라는 영화 프로젝트 때문이었는데, 당시 제작자는 임모양(미쓰 아시아-태평양 출신)이었고, 감독(내정자)은 김모양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엎어졌지만 제게 몇 가지 오래 기억할만한 선물(?)들을 남겼습니다.
당시의 제작자 임모양은 일본의 정상급 야쿠자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일본에서도 고급 관광지로 유명한 홋카이도(北海道)의 유서 깊은 료칸(旅館, 거의 식스스타급)에서 유유자적 띵까띵까 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뭐 달리 할 일이 없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포커를 쳤고 당연히(!) 제가 왕창 땄습니다(저는 ‘하우스 출신’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들이 돈을 돌려달라고 하기 전에, 저는 나몰라라 쇼핑에 나섰습니다. 평소에 눈 여겨 보고 있었던 프랑스 Gaultier의 걸작 스틸 프레임 가죽가방, 늘 마셔보고 싶었던 샴페인 Salon S, 그리고 바로 이 휴대용 재떨이 ABITAX입니다.
사실 아비탁스는 고띠에나 살롱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싼 가격(국내 환산가격이 고작해야 약 4만원 남짓)입니다.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도 쇼핑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홋카이도의 LOFT(일종의 다이소 같은 곳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를 두리번거리다가 이 상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살롱은 한국에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그들 영화 스태프들과 마셔버렸습니다. 고띠에의 가죽가방은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싸구려 아비탁스 휴대용 재떨이를 아직도 가지고 다닙니다. 그게 올해로 벌써 30년째입니다.
저는 이 ‘금연의 시대’에도 여전히 애연가입니다. 하지만 길거리에 재를 떨거나 꽁초를 함부로 버리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이 아비탁스를 지니고 다니면서, 반드시 이 안에 재를 떨고 꽁초를 구겨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이것을 제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닙니다. 산행을 하건, 여행을 하건, 그냥 일상의 시간을 보내건. 덕분에 이 친구는 저와 함께 그야말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알프스의 빛나던 밤과 히말라야의 장엄한 일출과 아프리카의 신비로운 저녁노을을 모두 이 친구와 함께 맞았습니다.
이 친구가 저에게 특별한 이유는 ‘여러 번 헤어졌지만 극적으로 재회’한 기억들 때문일 것입니다. 거의 열 번 가까이 잃어버렸는데 그때마다 기적처럼 되찾았던 겁니다. 이 친구를 잃어버린 건 대체로 산 위 아니면 술집이지요. 언젠가 통영의 다찌집에 이 친구를 놓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전화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찾아왔지요. 제가 사랑하는 수락산에 이 친구를 놓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하산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산행친구들에게 먼저들 귀가하라고 하고 캄캄한 밤에 이 친구를 찾아 홀로 다시 산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 친구는 그곳에서 “자기를 잊고 간 나에게 눈을 흘기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심지어는 인수봉 정상에 이 친구를 놓아두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저는 산행 후배에게 애걸복걸을 하여 다음날 이 친구를 찾아 다시 인수봉에 올랐지요. 그때도 이 친구는 “밉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다시 올라와줘서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인연이 이러하다보니 이 친구는 저에게 매우 각별한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마치 ‘신체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느낌이랄까요? 요즈음에도 외출에 나설 때면 제일 먼저 이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이 친구가 없으면 외출도 불가능할 지경입니다. 귀가하여 옷을 벗을 때에도 주머니를 뒤져 이 친구부터 찾습니다. 만약에 없다면? 바로 패닉 상태에 빠지며, 그날 하루의 동선을 꼼꼼히 체크해보겠지요. 아직까지는 운이 좋았습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거의 매일을 함께 하였으니까요. 만약 언젠가 이 친구를 영영 잃어버린다면, 마냥 허전하고 그리워 남 몰래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소중하고 가까운 친구입니다.
화산회의 멤버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2020년)부터 계속 이런 소리를 해왔거든요. 내년이면 얘랑의 인연이 30주년을 맞아. 얘한테 너무 고마워. 얘한테 뭐를 선물해주면 좋을까? 진심입니다. 저와 30년 동안 거의 매일을 붙어 다닌 이 친구에게 뭐라도 좋으니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습니다. 뭘 해주면 이 친구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제게 정겨운 웃음을 지어줄까요? 금(金)칠을 해줄까요? 아니면 다이아몬드라도 박아줄까요? 설마 그런 천박한 선물을 받으면서 기뻐해줄 것 같지는 않지요? 여러분이 좋은 선물을 한번 추천해주세요. 30년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한 친구에게는 어떤 선물을 해주어야 그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요?
포스팅을 막 마치고 나니 아비탁스가 저에게 묻습니다
너 도대체 산에는 언제 갈 거야???
돌이켜보니 작년 10월 12일 제 생일날 수락산에서 넘어진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산에 통 못 갔습니다
그저 제 집필실 바로 앞의 노고산에나 산책 삼아 몇번 올라갔지요
이제 소한도 지나고 대한도 지나고...조금 있으면 입춘이 오는군요?
제 친구 아비탁스가 도시 공기 말고 산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하니
2월에는 기운을 차려서 산에나 가야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