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최예선 등록일: 2009-12-06 16:29:12 IP ADRESS: *.161.23.39

댓글

4

조회 수

3898
에도가와 란포 <음울한 짐승>


미국의 추리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경외감으로 작가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순문학 계열의 작품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 아쿠타가와라면,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추리문학상은 에도가와 란포일 것이다.    

‘나의 소망은 이른바 리얼리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공상적인 경험은 현실에 비하면 한층 더 리얼하다’   -에도가와 란포

현실이 낯설고 공상이 친근하다.
나는 가끔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 현실에 대한 낯설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관계에 얽혀 내가 어떤 말을 내뱉는 순간에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말조차 낯설다. 현실에 대한 낯섦에서 더 나아가 내가 낯설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란포의 소설은 나에게 무척 친근하다.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누군가는 우람한 둥치에 대해서 또는 종횡으로 수없이 뻗어나간 가지에 대해서 또는 바람과 희롱하는 푸르른 잎사귀에 대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란포는 어둔 대지 깊숙이 파고드는 뿌리에 대해 쓴다.
밝은 대기를 향해 뻗어나간 둥치와 가지와 잎사귀의 리얼리즘이 아닌, 캄캄한 곳에서 고독하게 더듬이를 내뻗는 뿌리에 대한 리얼리즘이다.

재력가 남편의 사랑받는 부인인 시즈꼬로, 원고지 칸을 피투성이로 채우는 오에 슌데이라는 추리소설가로, 그리고 남편인 오야마다로 1인 3역을 넘나들면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음울한 짐승),
직공들의 봉급 5만엔의 행방을 찾아내기 위해 친구와 게임을 하는 (2전 동화),
도스트엡프스기의 죄와 벌에서처럼 하루하루가 살기 힘든 젊은 고학생이 할머니를 살해하고 화분 속의 돈을 훔쳐내자, 심리시험으로써 범인을 잡아내는 (심리시험),
모든 입출입구가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헌책서점의 안주인이 살해되는 (D언덕의 살인),
안으로 잠긴 빌라의 방에서 약물로 살해된 남자가 접근불가능으로 인해 자살로 판명나자, 아마추어 탐정의 명석함이 살인자를 밝혀내는 (천장 위의 산책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십 년이 흐른 후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범행 당시를 반추하는 (두 폐인),
아주 못생기고 연애 한 번 못해본 의자 만드는 장인이 아주 푹신한 1인용 소파 속에 숨어들어 그 의자에 앉게 되는 여자를 사랑하는 (인간의자),
세상이 권태로운 사내들이 빨강 방에 모여 자극적인 얘기에 환호하는 (빨강 방),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는 거울에 비친 세계를 더 사랑하던 사내가 결국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거울지옥),
전쟁에서 두 다리와 두 팔 그리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사내를 돌보던 여자가 무기력과 권태 속에서 남자의 몸통에 달랑 붙은 성기에 집착하다가 유일하게 인성을 간직한 남자의 눈빛마저 지우기 위해 눈을 찔러버리는(배추벌레),  
이렇게 소설집에는 10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세상 살아가는 의미에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혼자서 외롭지만 구태여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 하지 않으며, 세상의 온갖 것들을 맛보아도 이내 권태에 휩싸이고, 상식적인 소통에 이내 싫증을 느끼는 몽상가들이다.
여기에 란포 소설의 특이한 매력이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몽상, 공상가적 기질, 은닉한 자, 외딴 집, 어둠, 소외된 공간, 밀폐된 공간 등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은밀한 쾌감에 대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의 주민이 아니고서는.



profile

심산

2009.12.06 17:03
*.237.81.108
와우 예선, 너무 멋진...예선 다운(!) 글이다
이거 이거...스쿨 홈피에서 '읽을만한 글'이 많아지니까 참 좋군?
이번 연말이벤트 끝나면 아예 이런 메뉴를 하나 만들 것을 진지하게 고민중...^^

김정한

2009.12.07 02:12
*.47.197.18
에도가와 란포가 에드가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예명이군요.^^
저는 분명 이 책을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용을 보니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꽤나 오래전,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읽던 시절에 읽고 스쳐갔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간결하고 핵심을 짚는 글을 써야 하는데...ㅠㅠ

최예선

2009.12.07 15:28
*.161.23.39
메뉴 만드세요, 서로 맛있었던 것을 나눠먹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쓰면 재미없죠오~~ㅎ 정한님 글이 훨 재밌어요^^

이재옥

2009.12.08 17:11
*.144.35.2
특히 일본 근대 문학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정말 일본인들은 외계인 같아요.
매번 감탄하면서도 오싹하게 만든다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 내가 뽑은 올해의 사진 [스톤누드] + 3 file 김만수 2009-12-14 2900
10 내가 뽑은 올해의 책 #8 [만들어진 신] + 4 file 김정한 2009-12-13 2685
9 내가 뽑은 올해의 책 #7 [최종이론의 꿈] + 2 file 김정한 2009-12-13 2856
8 내가 만난 올해의 좆만이들 + 9 문영화 2009-12-11 2682
7 내가 뽑은 올해의 책 #5 [심산의 와인예찬] + 4 file 김정한 2009-12-09 2671
6 내가 뽑은 올해의 책 #4 [아내가 임신했다] + 5 file 김정한 2009-12-09 3047
5 내가 뽑은 올해의 사진 #1 내셔널 지오그래픽 공모 대상작 + 5 file 서영우 2009-12-09 2996
4 내가 뽑은 올해의 책 #3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7 file 김정한 2009-12-09 2796
3 내가 뽑은 올해의 책 #2 [언어의 진화] + 4 file 김정한 2009-12-08 2639
» 에도가와 란포 [음울한 짐승] + 4 최예선 2009-12-06 3898
1 내가 뽑은 올해의 책 #1 [아쌈 차차차] + 4 file 김정한 2009-12-06 3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