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서영우 등록일: 2009-12-18 10:35:27 IP ADRESS: *.145.16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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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에 따르자면, 5.16군사 혁명때 박정희 호위부대(경호부대던가)로 전라도에서 청와대로 올라와서는 엄청 지루한 생활을 하다가 큰형님(내게는 얼굴도 모르는 큰 아버지)의 빨치산 활동 및 월북 이력으로 다시 전라도로 귀대. 당신께서는 '아싸!'를 외치며 낚시대를 꺼내 고향으로 줄행랑 쳤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쫄따구들이 밥해줘, 빨래해줘, 틈나면 낚시해서 회떠먹어, 만고 땡 보직 해안 경비 초소였다고 하니, 서슬퍼런 당시의 서울 생활이 답답하셨겠지. 학창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육군본부로 경찰학교로 결혼식에 따라다니면서 나름 잘 나갔다던 당신의 군생활에 어느정도 수긍이 가긴 하지만, 그럼 뭐하나 큰아버지께서 남기신 주홍글씨는 집안 전체에 공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는 족쇄가 되었으니, 당신께서는 전역을 강요 당했고, 친척들은 공직에서 승진에 문제가 됬으며, 육사를 지원했던 나 또한 신원조회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큰아버지의 주홍글씨는 우울하고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덕분에 내가 세상에 튀어 나올 수 있던 한 요인이었으니, 당신께서는 건설이 한창 붐을 이루던 70년대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상경하여, 형제들과 의기투합. 제재소를 차리셨고 큰형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주말이면 현금으로 수금한 돈을 온 식구가 거실에 모여 앉아 밤새도록 정리해야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어릴적에 우리집은 판자촌 가운데 번듯한 양옥집이였으며, 피아노와 전화기가 있었던 기억과 작은아버지가 태워 주던 차가 벤츠였다는걸 알게되고선, 이게 아버지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시절에 당신께 없던게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를 만나 아들을 얻는데 성공하시는데, 그 아들이 나다.

아버지라는 사람들은 원래 집에 일주일에 한번 들어오는 사람인줄 알았다. 그리고 말한번 잘못하거나 밥상에서 투정이라도 부릴라치면 곧바로 상이 물려지고, 눈물 콧물 쏙 빠지도록 혼을 내주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보기도 힘든 사람이라서 어려운데다가 당신의 비위를 상하면 무시무시한 호통에 손을 잡아 본다던가, 등에 매달려 본다던가 하는일을 꿈도 꾸지 못했다. 얼마나 주눅이 들어있었나 하면, 둘이서 시골로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잠자리에서 아버지의 살에 닿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덥더라도 꼼작도 하지 않았고, 뒤척이기는 커녕 꼬물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다가는 또 혼날것 같았서. 개천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타던 겨울 어느날에 생각지도 않던 아버지께서 스케이트를 들고 환하게 웃으시며 개천을 찾아 오셨다. 친구들은 모두 나무판대기와 철사로 얼기 설기 만든 썰매를 탈때, 아버지가 신겨준 스케이트를 엉거주춤 신고 의기양양했었다.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던 유일한 유년의 기억. 어쨌거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는 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작은 아버지들의 부도, 제재소는 이제 사양산업. 아버지의 제재소도 팔리고 기세등등하던 가세는 순식간에 초라해져갔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던데 그건 지난 3대가 부자로 살았던 집안 이야기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고 살는데 정신 없으시고, 슬슬 머리가 굵어 가던 나는 사고나 치고, 공부도 않하고, 말수도 없어지고, 아버지와는 더 멀어지고. 뭐 그런거지 어른들은 사는게 버겁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몰래 담배나 피우고, 술이나 마시고 집에는 붙어 있지 않고, 밖으로 밖으로... 제법 규모 있던 제재소를 정리하신 아버지는 작은 가내 수공업같은 공방을 차리시고는 재기를 노리셨었다. 그러다 기계에 손이 말려들어가는 사고가 났다. 제재소 시절 이미 왼쪽 새끼 손가락을 잃으셨었는데, 이번엔 오른손이 사고가 났다. 결국 검지와 중지, 손바닥의 일부가 제거 됬다. 그때가 고2 여름. 그냥 손을 잡았다.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잡고만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장기. 뭐 다 가지고 두냐.' 피식. 사실 어버지랑 장기 둬본적도 없다. 대화도 않하는데 장기는 무슨... 근데 손가락을 장기판에 쫄 같은 것에 비유하시다니. 아버지가 환갑을 바라볼때서야 당신이 쿨하다는 걸 알았다.

지난 몇년은 정말 어찌어찌 살아버린것 같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러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게 되고(돌아가셨다는건 아니고, 병환으로 요양병원에 모셔야 했다.) 어쩌다 보니 아이와 덜렁 남겨졌다. '이거 뭥미' 란말이 절로 나왔다. 돈좀 벌어보겠다고, 든든한 회사(남들이 보기에 든든하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든든할 것도 없다.)를 뛰쳐나와서는 시작한 일은 3년만에 시원하게 말아먹고, 한건 해보자는 꼬드김에 들어간 밴쳐 회사도 펑. 기술자 본연의 자세로 입사한 회사에는 일감이 줄어 꽁밥을 먹는게 싫어서 사표. 아 다들 이렇게 프리렌서가 되는구나. 그래도 정신없는 삶도 정신없는 대로 정리가 되어(정신없는 것도 패턴이 있더란 말이지.)정신좀 차리고나니 아이가 7살.그 동안 슬쩍슬쩍 빠지던 추석 맞이 벌초를 하러 처음으로 3대가 손을 잡고 출동. 아들놈이야 시골이 마냥 신기하니 풀어놔도 알아서 잘 뛰어 다니고,( 뱀에만 물리지 않으면 된다.) 나야 1년을 빼먹은 벌초 작업에 정신 없었고,아버지는? 손주가 봉분에 올라가거나 하는 불손한 행동에만 반응을 보이시고는 시큰둥. 친구들 아버님을 보니 손주녀석에게 죽고 못 사시던데, 약간 서운하지만, 그래 워낙 무뚝뚝한 양반이니까.

벌초가 끝나고서는 가까운 바다로 바람을 쏘이러 갔다. 저녁에 먹을 해산물도 좀 사고, 조금만 가면 꼬막이 유명한 마을도 있으니. 물빠진 해변에 아들은 적응 못하는 눈치다. 손톱만한 게, 소라 따위를 잡아주니 그때서야 뻘을 뒤집으며 게를 잡는다. 소라를 잡는다 난리다. 파도가 오거나 말거나 신경도 않쓴다. 어차피 옷이야 갈아입히면 그만이고, 썰물때라 물에 쓸려갈 염려도 없었다. 담배도 피울겸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잔 뽑았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각도에서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나머지 커피를 들고 아버지와 아이곁으로 갔을때, 낼름 거리는 파도에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이를 위해 뻘을 파다가도 파도가 밀려오면 얼른 아이를 안아 올리시는 모습이라던가. 그러지 못하면 진결.진결 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모습. 무엇보다 한시도 아이를 당신의 시선에서 떼어 놓지 않는 모습. 그 모습. 어릴적에 본적이 있다. 그 호통. 어릴 적에 들어본적 있다. 어린 내게 했던 그건 ... 혼내는게 아니었더라. 아.

올해 찍은 최고의 사진. 아버지와 아들이다.

[img1]

김진석

2009.12.18 12:49
*.12.40.230
감동!!!

차민아

2009.12.18 13:44
*.10.166.118
어제 마신 와인이 깰 무렵... 한 잔 생각나는군요...

홍성철

2009.12.18 14:15
*.236.3.225
『아버지와 아들』!
제목 잘 뽑았다. 그니깐 영우의 아버님과 영우의 아들이란 말이지..
저 순간에 카메라를 든 영우가 있었던 게고..
『할아버지와 손자』보다 훨 낫다. ㅎㅎ

(사진을 배우지 않고 사진전 구경만 해본 나로서는 렌즈가 어떻고 조리개니, 셔터니 어떻게
설정했다는거 보다 그 사진에 담긴 스토리를 함께 들으면 늘 끄덕여지더라.. 사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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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9.12.18 15:47
*.192.162.222
좋아~

김주영

2009.12.18 15:56
*.121.66.212
일찍 작고하신 아버지를 그리게 만드는 글이군요
사진보다 글이 더 감동입니다^^

서승범

2009.12.18 21:15
*.171.187.198
아버지랑 한 잔 했냐.

예쁘고 좋아도 그런 표현을 하면 안되는 줄 아는,
그래서 어떻게 표현하는 줄도 모르는
그 세대 어르신들에게 한 잔 올립니다.

최준석

2009.12.18 22:37
*.152.24.74
좋구만요..^^

박범수

2009.12.28 15:43
*.55.158.177
ㅠ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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