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19 17:49:58 IP ADRESS: *.146.2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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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또 오르는 심정
icaru

산을 좋아하던 시인 고정희는 지리산에서 그만 실족사하였다. 오래 전에 읽은 성석제의 어떤 칼럼에서 지리산을 등반하던 중 추락하여 죽음의 코앞에 다가가는 아찔한 경험에 대한 술회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고 했던 것도 위에서 말한 인상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살까말까 망설이며 뒤적이다 발견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더더욱 나를 부추겼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순간 불안이 가시고 지난날의 일들이 눈앞을 스치며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그리고 갑자기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며 자기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 나와 밖에서 자기를 쳐다본다.”

“그것은 유니크하고도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7~8미터를 추락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추락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고, 회한과 그리움이 담긴 짧은 인사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결국에는 죽음까지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게 되는 지극히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오이겐 라인홀트 메스너의 산에서 극한 체험에 대해 쓴 [죽음의 지대]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 다가간 자의 기록도 있고, 산에 미친 사람의 유쾌한 청춘 고백도 있고, 등반을 비즈니스처럼 여기며 철저한 프로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오르고 또 오르려 하는 자의 기록 또한 있다.

이들은 왜 산을 오를까. 라인홀트(최강의 클라이머이자, 최강의 산악 문학 작가)는 말한다. ‘정복을 위한 등반’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등반’이라고.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징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삶을 지속시키고 싶어서 산을 찾는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지대인 악산에서 삶의 한계에 부딪쳐 본 자만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달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무’ 즉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깨달음이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는 말한다.

“자기 인생이 ‘무’라는 것을 안 자만이 자기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일단 죽음의 지대에 들어서면 의미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사람은 불안에서 해방되고 시간적 공간적 무한 속에서 자기를 해소시키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겪고 나면 사람은 자기가 새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상태는 -다시 산기슭에 내려오게 되므로-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산을 내려오면 그 깨달음의 지속이 끊긴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도달의 지속을 위해 이들은 오르고 또 오르고 ‘죽음과 대면하는 극한의 체험’에 다가가는 것 같다. 솔직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선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다가갈 경지일 것이다.   산(뒷산을 등산하는 형태이든, 악산을 등반하든 형태이든)을 좋아하는 필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산서(山書:산에 대한 책들)에 대해 기록해 놓은 책이 이 것이다. 산에만 오르고 산서를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산행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산서에만 매달릴 뿐 산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어설픈 남독이라고 필자 심산은 말하고 있다.

산서에 빠진 필자가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는 산서(산에 대한 책)들은 시보다 시적이고,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며, 영화보다 드라마틱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해 보인다. 그리고 주로 블루톤의 산을 담은 사진과 깔끔한 편집도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삶이 너무 지지부진하다고 느끼는 나는, 심산이 소개한 산서 중에서 아무래도 라이홀트의 [죽음의 지대]를 읽어보아야겠다.

[알라딘] 마이리뷰 2004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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