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3-05 23:03:32 IP ADRESS: *.147.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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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충만 ‘마운틴 오르가슴’

이상실/정신세계사 편집장

[한겨레 2005-12-30 16:30]    

[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심산 ‘마운틴 오딧세이’

이 산서 이야기를 읽게 된 건, 사실 마운틴이 아닌 마라톤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마라톤 경기에 처음 눈길이 가 박히던 날, 출발선을 지나고서야 운동화 안쪽에 모래 한 알이 자리했음을 눈치채고, 그것이 자갈이 되고 바위로 자라나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는 우승자의 말, 그에게 완주까지의 두 시간 삼십여 분은 그 바위가 된 모래 한 알과의 싸움이었다는데, 그 말에 어찌 문득 깨닫는 바가 없을손가. 이후로 내게도 달리는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느 순간 온몸이 이루는 극도의 균형감각, 발 딛는 땅이 발을 타고 몸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그 강렬한 근질거림이 주는 쩌릿한 쾌감, 몸 전체가 진공 상태가 되면서 정신이 아뜩해지는 그 절명의 기분을. 하지만 섣부른 쾌락에 무릎을 다친 후, 마음은 먼산바라기로 트랙을 달리며 몸은 그 대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는 그 와중에 만났다.

직업이 편집자이면서도, 보는 책의 취향은 편벽되어 늘 어느 범주를 못 벗어나다 슬쩍 옆눈으로 부딪친 책이건만, 의외로 깊은 맛이 있었다. ‘산이 만든 책, 책 속에 펼쳐진 산’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산악문학작품 22편을 소개하며 저자의 감상을 앞뒤로 풀어내는 내용이다. 삶이 너무 지지부진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권하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죽음의 지대>, 촌스러운 제목만큼 강렬한 한 자유인의 방랑일기 <내 청춘 산에 걸고>, 도저한 슬픔의 서정성을 드러내는 <빙벽>, ‘손바닥을 얹으면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바위)을 노래하는 산시인 김장호의 시집 등. 그리고 아,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 1984년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 태백산맥을 단독 종주한 위대한 여성의 산행일기,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칫솔의 반토막까지 잘랐다는 데서야…. 나 또한 그 책을 읽고 백두대간에 올랐다. 아홉 구간을 듬성듬성 헤집다 긴 휴지기에 들어선 지금이지만, 산이라는 하나의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인 ‘의지와 애정’을 소개해준 그에게 이 자리를 빌어 새삼 감사하나니.

그런데 왜 그들은 오르고 또 오르는가. 어찌하여 ‘길이 아니면 가고, 길이면 가지 않는’ 삶이 되어버렸는가. 우문에는 현답이 따르는 법. 우리네 삶이 선사하는 가장 큰 무상의 가치, 그 정직한 보상의 세계를 알아챈 것. 나 또한 짧은 체험일지언정,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쾌락으로 ‘러너스 하이’와 ‘마운틴 오르가슴’을 느껴볼 것을 권장하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으니, 히말라야가 아닐지라도 밤을 넘고 새벽을 가르며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오르고 내리기를 진저리치게 반복하다가 맞게 되는 그 허망한 충만, 그 오랜 절정의 기분을.

그러나 막무가내의 감동에만 붙들려 있기도 힘든 일. 입장 바꿔 산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등반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메스너처럼 ‘존재를 위한 등반’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산악인은 산을 그저 정복의 대상으로 볼진대, 역지사지라고, 인간을 받아들이는 산의 너그러움을 살펴, 그 자연의 포용력에 감읍해야 하는 것이 또한 인지상정일 듯. 진정한 마운틴 오르가슴은 산을 정복함으로써 느끼는 것도, 초인의 세계에 나를 들여놓는 기쁨에서 오는 것도 아닐 것이며, 내 안의 ‘비루한 인간본성과 몰염치’를 넘어, 신산하고 그악스러운 삶의 풍경을 맑게 비추어내는 지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아무려면, ‘일단 펼쳐들면 시보다 시적이고, 소설보다 드라마틱하며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한 것’이 산서의 세계인 듯하니, 한 번쯤 공감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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