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07-19 01:17:09 IP ADRESS: *.110.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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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산악인 고미영(42·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씨가 그의 열한 번째 8000m급 고봉인 낭가 파르바트(8125m)를 등정하고 내려오던 중 지난 12일 1500여m를 추락해 사망했다. 늘 쾌활한 웃음으로 당당하게 자신감을 내비치던 그였고, 추락 지점도 안전한 고소캠프(6100m 2캠프)를 불과 100여m 앞둔 지점이어서 사고를 접한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현장에 있던 고씨의 일행과 각국 산악인들, 파키스탄 당국은 헬기를 동원해 그를 구조하기 위해 나섰지만 악천후와 눈사태에 의한 2차 사고 위험으로 난항을 겪다 추락 나흘째인 16일 오전 11시경(현지시간)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참혹하게 추락한 고미영씨의 모습이 헬기 수색 중 발견되고, 현장에 있던 방송 카메라에 잡혀 국내 매스컴을 통해 연일 알려지자 산악계는 더욱 비통해 하면서도 평소 고씨를 알고 지냈던 산악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날 그의 행보를 두고 대부분 미디어에서는 '세계 최초' '여성' '철녀'라는 찬사와 각광으로 포장해 왔었는데, 이제 한 개인의 명예와 인간적 존엄을 위해서 그의 일기장을 들추는 것과 같은 원색적 보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42년 고미영이 걸어왔던 길도 다른 누구에게처럼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산에서 살아왔던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그건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도전과 응전'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불꽃은 그의 반생에 걸쳐 활활 타올랐으며, '죽음의 지대'의 절벽에서 만년설과 함께 사그라졌다.

불꽃과도 같았던 20년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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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25일, 혼자 구파발에서 시작해 북한산 산행에 나섰던 스물두 살 고미영은 깔딱고개를 올라 위문에 이르자 두 갈래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왼쪽은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철주 난간을 붙잡고 오르는 백운대행 일반 등산로였고, 오른쪽은 오르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가파르고 위험한 만경대 능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고미영은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지금 낭가 파르바트 위에서 멈춘 그의 첫 걸음이었다.

일전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미영의 궤적을 보며 '코드'라고 표현했었다. 실제로 90년대 '고미영'이라는 세 글자는 우리 스포츠 클라이밍계의 코드였다. 그 단어 안에는 '등반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고도 '목표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 '정직한 땀을 흘릴 줄 아는 사람' '당당하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모든 뜻이 담겨있다. 바위 아래서 만났던 고미영에겐 늘 누구에게서나 쉽게 찾기 힘든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으며, 그게 허세와는 거리가 먼, 정직으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이라는 건 주변의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 부안 태생, 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전학을 와 졸업 후 농수산부 교육원 공무원으로 취직하며 서울 생활 시작. 그날 스스로 선택한 가파른 길을 향한 우회전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길은 여느 도시민이 매일 걷는 길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북한산 산행 이후 무언가 심장을 울리는 음성을 들었던지, 그의 삶은 이후 비탈로 나있는 한 갈래로 줄곧 뻗어나가게 됐다. 평소 입버릇처럼 "갈림길에 섰을 때 주저하는 데는 수천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던 그였다.

수직의 바위에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고미영의 길은 그 시절 자신의 노트에 적어두고 늘 보았다는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는 주문과도 같았다. 첫 산행을 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72kg이었다. 160cm의 작달막한 키에 대어보면 암벽에 매달리는 것은 언뜻 상상하기 힘든 몸매였다. 단지 암벽등반을 더 잘하고 싶어 당시 노량진에 문을 연 실내암장을 찾아갔던 고미영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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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아가씨가 왔으니 대부분 남자들이었던 그곳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사람들이 '며칠이나 나오고 말까?'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벽에 매달려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땐 스포츠클라이밍이 아직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초창기라 혼자서 책을 보며 배우는 것들도 많았어요."

운동을 시작한 그는 한번 직벽에 매달리면 40분은 땅을 밟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점심시간을 비우고 구내 헬스클럽에서 벤치프레스를 들었다. 처음엔 20kg짜리를 들다 도저히 기운이 빠져 더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면 40kg의 무게를 얹고 악을 썼다. 그렇게 1년 만에 그는 20kg 넘는 몸무게를 감량하고 날렵해진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당시 그와 함께 인공암벽에 매달렸던 고 차선영씨(92년 사망)를 고미영은 늘 떠올렸다. 운동이 끝나고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고미영에겐 가슴이 벅찼다는 차선영씨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국내를 주름잡던 여성 클라이머였다. 그가 인수봉 등반 중 낙석사고로 사망하자 주변에서는 "10년 안에 그런 여성 클라이머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영웅의 죽음은 고미영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뚜렷한, 그러나 여전히 척박한 황무지에 있을 그의 길에 대해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차선영씨의 꿈은 세계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이었는데, 저도 같은 꿈을 갖게 되었어요."

93년 암벽등반대회에 처음 출전해 6위를 기록했던 고미영은 2년 만에 국내 1위, 그리고 고산등반으로 접어든 2005년 이전까지 아시아 최고, 세계 무대에서도 늘 상위권을 기록하며 명실공히 국내 여성 스포츠클라이밍 분야의 히어로로 자리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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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드 밖으로 행군했던 지난 4년 여

2005년 고미영이 첫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을 때 주변에선 격려와 기대만큼 우려 섞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가 속했던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들과 함께 나섰던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 등반 때만 해도 그는 고산등반에 있어서는 분명 '왕초보'였기 때문이다. 15m의 인공암벽을 6분 안에 올라야 하는 스포츠클라이밍 경기와 달리 고산등반은 지루한 기다림과의 싸움이며 희박한 공기 속에서 추위와 고독을 견뎌내야 하는 또 다른 벽이 있었다. 고미영은 정상을 15m 가량 앞두고 60여m나 추락하지만 아픈 몸을 추스르고 기어이 정상에 서고 만다. 클라이머로서 정점에 섰던 그는 홀드(암벽의 손잡이) 밖의 세계를 찾아 스스로 더 척박하고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고미영은 당시 "이제 알피니스트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서구의 산악 개념으로 250여년 전 알프스에서 출발한 알피니즘(alpinism)은 모든 산악인의 지향이며 고고한 이상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등산은 스포츠가 아닌 삶의 방법'이라거나 '무상의 행위'요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찾는 존재론적 자기인식'이라고 표현했다.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알피니스트의 길은 단지 기록을 좇는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 결과와 보여지는 수치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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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고산등반에서 자신감을 얻은 고미영은 이듬해 에베레스트(8850m)에 도전했다. 세계 최고봉으로 나서며 그는 "누구나 가보고 싶은 곳 아닌가요? 고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함께 가는 대원들과 어울리며 많이 배우는 계기로 만들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허나 결과는 혹독했다. 변변한 등반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발가락 동상에 걸린 그는 다른 대원들보다 먼저 하산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훗날 그때의 실패는 경험부족에서 온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었던 그는 10년 후배라도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해 마음을 낮춰 조언을 구할 줄 알았으며,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 4시 기상.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인공암벽 훈련, 외국어 공부, 독서, 일기, 11시 취침으로 일관했던 것이 산을 향해 '올인'하고 난 뒤 고미영의 일상이었다. 97년 고미영은 12년간 다니던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참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던 그에겐 모든 것을 행복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었다.

첫 8000m급 고봉 등정이었던 2006년 가을의 초오유(8201m)와 이듬해 재도전 끝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이후 세 번째 브로드 피크(8047m)를 준비하던 2007년 여름, 나는 달리기를 막 끝내고 땀에 절어있던 그를 만났다. 당시 조심스레 그에게 8000m급 14좌에 대해 물었지만 "주위에서 14좌 말을 많이 하지만 성급한 얘기이고, 고산을 목표로 새롭게 시작했으니까 이제 여기에 집중하고 싶다"고 겸손을 잃지 않았다. "뭐든지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죠. 한발 한발 걷다 보면 정상에 도착해 있지 않겠어요?"라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던 고미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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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미영에게서 무얼 찾고 있었나

2007년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8027m), 2008년 로체(8516m), K2(8611m), 마나슬루(8163m), 올해 마칼루(8463m) 캉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8167m) 낭가 파르바트로 숨 가쁘게 달려가는 고미영을 보며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전에 없던 '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약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 그 '죽음의 지대'를 겪어보지 못한 평범한 우리들로서 이 영웅을 닮아가는 추체험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는 세계 처음으로 8000m급 14좌를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엄홍길을 필두로 박영석, 한왕용이 그 대기록을 달성했다. 허나 진정 우리가 그들의 산행에서 찾고 싶었던 건 '정복'이 아닌 '존재'로서 거기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아니었을까.

등산 말고 잘하는 게 없냐고 물었을 때 고미영은 "노래 잘하고 춤 잘추고 아! 기타 연주도 조금"이라고 답했었다. 아직 그의 연주를 듣지 못했고, 앞으로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고미영’이라는 이 세상에서의 작고 작은 이름 하나가 단지 기록과 경쟁에 묻혀 세상에 울려 퍼지지 못한 기타 연주가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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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07.19 01:47
*.110.20.70
역시 이영준 기자가 쓴 글을 읽으니 조금 위안이 되네요
고미영의 사망 이후 각종 '찌라시 신문'들이 쏟아내고 있는 선정적인 보도나
뭣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비난성 기사를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는데...

고미영은 명예나 돈이나 기록이나...뭐 그런 것에 집착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용감하게 유쾌하게 살아갔던...그런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들만 몰랐지 그녀는 이미 스포츠 클라이머 시절에도 '세계적인' 클라이머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돈이나 명예 때문에, 혹은 스폰서의 강압(?) 때문에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히말라야에 도전한...그런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여러 언론에서 고미영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졸라댔는데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일간신문의 짧은 칼럼 따위에 가십성 기사를 써도 좋을...그런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굿바이, 미영!

넌 정말 멋지게 살다 간 여자야...
아니 멋지게 살다 간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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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록

2009.07.20 09:43
*.51.77.127
이 기사를 읽고 '라인홀트 메스너'의 고비를 가다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읽다보니...
"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은 아닐 것이다 " 라는 문구가 나오더군요.
히말라야와는 비교도 할수 없는 자전거로 떠나는 국내여행을 할때에도..이런 생각이 드는데..히말라야에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죽을지도 모른다면 생각을 하면서도...그곳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끌어당기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지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한번 고 고미영대장의 명복을 빕니다.
profile

심산

2009.07.20 16:13
*.237.81.94
미영이 기타 퉁기며 노래하는 모습은 정말...넘 이뻤지
노래방에 가면 방방 뛰면서 노래하고...^^

최상식

2009.07.22 23:56
*.101.225.144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네요...볼때마다 괜시리 마음이 허해집니다

김강덕

2009.07.24 11:41
*.47.7.25
인수 야영장에서 어떤 사람이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조그만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고미영씨였다. 땅바닥을 마치 방바닥처럼 배를 깔고 드러누워서..
선배들 이야기로는 처음에는 뚱뚱해서 별로 안 예뻤다고 하는데..
나는 예쁘게 화장한 모습만 봐서 그런지 산에서는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빙벽을 할 때나, 인공암장에서나, 자연벽에서나, 옆자리에 나란히 서 있거나 내가 바라볼 수 있었던 고미영씨는 쾌활하고 예뻤다.
낭가 파르바트에 간다면 나와 옷깃을 스친 인연을 가진 지인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될 것 같다.

최민초

2009.08.01 22:53
*.7.39.153
고 고미영님.
당신은 만년설에 사그라진 불꽃이 아니라
만년설에 영원히 피어 있을 불꽃입니다.

당신은 진정 행복합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다만 불행하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친 날개를 접고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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