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9-06-14 16:08:42 IP ADRESS: *.13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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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삿갓재휴게소.jpg

  

산에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시작하며

 

아주 오래 전의 어느 겨울날, 설경이 근사한 덕유산을 종주하다가 삿갓재휴게소에 당도했을 때였다. 멋들어지게 휘어있는 자연목의 나무 현판에 세로로 쓰인 문구文句 하나가 나의 시선과 가슴을 사로잡았다. 遊山如讀書유산여독서. 산에서 노는 게 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당시 공부가 너무 지겨워 책 보기를 돌 같이 하던 나에게는 묘하게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배낭 너머로 집어던지고 내팽개친 책들에 대하여 내심 품고 있던 은근한 미안함을 달래주는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이 멋진 문장의 원저작권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날 우연히 합류하게 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짐짓 그것도 몰랐느냐는 눈치를 주며 조용히 운을 떼었다. 퇴계退溪의 유명한 시구詩句에서 따온 문장입니다.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내 이미지 속의 퇴계는 고리타분한 유학자에 불과했다. 그런 책상물림이 유산의 즐거움을 독서에 비교했단 말이지? 그리고는 이 문구를 오랜 세월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내가 인문산행의 묘미에 빠져들어 뜬금없이 고전古典의 세계로 파고들기 전까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산여독서는 퇴계의 문장이라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유산과 독서를 대립항에 놓거나 동일한 체험의 양측면으로 파악한 한시漢詩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전문을 감상하고 음미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다. 본격적인 인문산행과 유산행각에 나서기에 앞서 유산과 독서를 논한 시들을 몇 편 읽어보는 것도 좋을듯 싶다. 먼저 내게 이 주제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 퇴계 이황 李滉의 시부터 읽어보자.

 

讀書如遊山 독서여유산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사람들은 독서가 유산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유산이야말로 독서와 비슷하네

공력이 다 하면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얕고 깊음을 아는 것 모두 이로부터 말미암네

앉아서 구름 이는 것 보면 묘리를 알게 되고

걸어서 근원에 닿아야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정상에 오르려 노력하는 그대들이여

늙고 쇠잔하여 중도에 그친 내가 깊이 부끄럽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으로서 독서와 유산의 관계를 잘 설명한 아름다운 시다. 자신은 비록 늙고 노쇠하여 여기서 멈추었지만 후배들에게는 정상까지 가라고 격려하는 마음도 뭉클하게 전해진다. 이 시에서 말하는 절정絶頂이란 산의 정상이면서 곧 유학의 완성을 뜻하리라. 하지만 위에서 보듯 퇴계의 원문은 유산사독서이지 유산여독서가 아니다. 하긴 사나 여나 비슷한 뜻이니 굳이 트집 잡을 일도 아니다.

 

오히려 위의 시에서 주목할 대목은 독서인설유산사. 오래 전부터 독서는 유산과 같다는 표현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표현의 연원을 찾아 역사를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갔더니 뜻밖에도 고려말의 대문장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의 유명한 시 <독서>의 첫 두 행은 다음과 같다.

 

讀書如游山 독서여유산

深淺皆自得 심천개자득

 

글 읽기란 산에서 노니는 것과 같아

깊고 얕음이 모두 스스로 얻기에 달렸네

 

목은 이색보다 앞선 시기에 독서와 유산을 한 문장 안에 표현한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목은이 최초로 독서를 유산에 비유했고, 그 이후의 문인들은 이 문장을 하나의 전범처럼 받아들였다. 내친 김에 중국의 한시들을 뒤적거렸다. 중국에도 역시 독서와 유산을 함께 논한 시인이 있었다. 청나라의 학자였던 효람曉嵐 기윤紀昀의 한시 역시 대동소이한 표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퇴계보다 223년이나 늦게 태어났으니 오히려 우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讀書如游山 독서여유산

觸目皆可悅 촉목개가열

 

글 읽기란 산에서 노니는 것과 같아

눈길 닿는 곳마다 모두 기뻐할만 하네

 

퇴계보다 42년 늦게 태어나 거의 동시대를 살다 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장은 그 전문을 감상할 만하다.

 

讀書如遊山 독서여유산

 

夫讀書如遊山 부독서여유산

有登山未半而止者 유등산미반이지자

有歷遍而未知其趣者 유력편이미지기취자

必也知其山水之趣 필야지기산우지취

方可謂遊山 방가위유산

 

무릇 글 읽기는 산에서 노니는 것과 같아

산에 반도 오르지 못하고 그치는 자가 있고

많이 돌아다녀도 그 정취를 모르는 자가 있네

반드시 그 산수의 정취를 알아야

비로소 산에서 노닐었다 할 수 있으리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독서다. 즉 한강이 후배 유생들에게 독서하는 올바른 태도를 유산에 견주어 비유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퇴계가 유산을 과감히 주어로 바꾸어 놓고 독서를 그에 비견한 것(유산사독서)은 획기적인 시상詩想의 전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 이 껄쩍지근한 갈증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려면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렇게 천명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遊山如讀書 유산여독서

산에서 노니는 것은 글 읽기와 같다

 

이 멋진 표현의 원저작권자는 퇴계보다 6년 먼저 태어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다. 그가 남긴 문집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실려 있는 시 <유산遊山>에 최초로 등장한다. 사실 신재와 퇴계는 거의 동년배에 해당하므로 누가 먼저 이 표현을 썼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사와 여는 다르다. 어찌되었건 독서와 유산을 제일 처음 논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목은은 독서가 유산과 같다고 했다. 신재는 유산이 독서와 같다고 했다.

 

신재 이후 유산여독서라는 표현은 하나의 관용어가 되었다. 자신의 문집에 유산여독서라는 표현을 남긴 사람들의 리스트는 이식, 어유봉, 성근묵, 김부필, 박여랑, 권정침, 강필효, 강헌규등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퇴계는 그들 중 가장 유명했던 유학자였을 뿐이다. 이들의 적극적인 평가와 찬미 덕분에 유산은 곧 독서와 동급으로 거론될 만큼 고상한 취미가 되었다.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산에 올라야 한다는 풍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한참 뒤에 영국의 레슬리 스티븐Leslie StephenThe Playground of Europe 유럽의 놀이터(1894)을 출간했을 때 이룩한 성취와 같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문산행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 한다. 유산은 독서와 같다고 했을 때의 의미는 유산행위 그 자체를 독서행위에 비견한 것이다. 즉 산행 그 자체의 의미를 독서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인문산행은 이 의미를 규정된 그대로 받아들이되, 독서의 성과를 산 위의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려 한다. 한시적漢詩的 비유로 표현하자면 遊山卽讀書유산즉독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가슴 벅찬 대장정의 첫 발자국을 이제 막 떼어놓는다.

 

2019년 여름을 맞이하며

노고산 아래 집필실 심산재深山齋에서

 

심산沈山

profile

심산

2019.06.14 16:09
*.139.1.130

곧 출간 예정인 심산의 신간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바다출판사, 2019)에는 본문 이외에 서문·프롤로그(시작하며에필로그(마치며) 등이 실려 있는데, 위의 글은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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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님

2019.06.15 09:30
*.36.158.161

마음에 새길 좋은 글귀네요. 책 기다려집니다^^

배영희

2019.06.16 12:18
*.101.2.202

와! 선생님 신간 미리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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