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6-23 22: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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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문학축전
2007년 6월 23일(토) 오후 5시-7시 서울 YWCA 대강당

며칠 전 한국문학평화포럼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시집을 출간하려 하는데 제가 쓴 시를 게재해도 되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나서 문득 아하, 내가 예전에 시를 쓴 적도 있었지, 하는 옛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어떤 시를 게재할지는 듣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졸시 [바리케이트 안에서]였습니다.

이제 와 읽어보니 너무도 날 선 시여서 다소 생경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입니다. 1987년 6월 10일 밤 명동성당 점거농성장의 "바리케이트 안에서" 쓰여 졌고, 같은 달 발간된 [민중문화운동연합]의 기관지에 실렸으며, 저의 처녀시집 [식민지 밤노래](1988)에도 실려 있는 시입니다. 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사흘낮 사흘밤](1994)은 건대항쟁, 유월항쟁, 이한열장례식이라는 1980년대의 가장 격렬했던 세 번의 ‘사흘낮 사흘밤’을 다루고 있는데, [바리케이트 안에서]는 이 장편소설 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속에 잠깐 등장하는 무명의 청년시인이 바로 저였지요.

[img5]

오늘(2007년 6월 23일) 오후에 명동성당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는 YWCA 대강당에서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문학축전]이라는 것이 열렸습니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민영, 김준태 등 원로급 대시인과 더불어 단상에 올라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른바 ‘문단 행사’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참가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조금 어색한 느낌도 있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혈기방장했던 20대의 청년시인이 이제는 세상사에 닳고 닳은 40대의 한량이 되어 새삼스럽게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행사장에서는 기념시집 [유월, 그것은 우리 운명의 시작이었다](화남, 2007)에 수록된 시를 주제로 최민화의 그림과 박용수의 사진이 한 데 어우러진 걸개그림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질풍노도의 80년대를 함께 보냈던 선배이자 어른이십니다. 제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둔 것은 홍일선의 시 [나, 그간 채광석형 잊고 살았소]였습니다. 채광석, 그리운 이름입니다. 20대 중반의 한 세월을 함께 보낸 그는 내게 언제나 ‘목소리 큰 맏형’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겨우 서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더군요. 그가 너무 일찍 간 것인지 제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것인지...여하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가슴 속에 담아두렵니다. 대신, 오랫만에 재발견(!)한 청년 시절의 시 [바리케이트 안에서]의 전문을 이곳에 올립니다. 지금 읽어봐도 잘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20년 전의 그 기억을 다시 되새겨보고 싶을 뿐입니다. 시 본문 중에 의도적으로 인용된 구절이 있어서 이곳에 밝힙니다. “外國商館의 늙은 머슴이/南朝鮮政府의 龍床을 어루만지며/꿈꾸는 榮華를 위해서가 아니라/또다시 노예가 되려는/동포의 위태로운 자유를 위하여"는 남로당 출신의 월북시인 임화가 1946년 6월 9일 집필한 시 [청년의 6월 10일로 가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img2]

바리케이트 안에서
-1987년 6월 10일 명동의 밤

심산

직격탄과 군화발과 곤봉에 무너져 가는
이 초라한 바리케이트의 밖은, 압제여
너희의 땅이다
너희의 역사다, 너희의 대통령 후보가
너희의 호텔에서 너희끼리 파티를 즐기고 헌법을 즐기고
너희의 선진국가가 너희의 정의사회를 구현한다

각목과 보도블럭과 화염병으로 지키는
이 처연한 바리케이트의 안은 그러나
외세여, 우리의 땅이다
너희가 비웃으며 짓밟아버린
그래, 차마 눈 못 감는 우리의 역사다
육시당한, 효수당한, 암매장당한
그래서 피 토하며 울부짖는 우리의 역사다

춥지만 배고프지만 무섭지만
너희는 모를 것이다
미치도록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너희는
이 기쁨, 죽었던 옛님과 몸 섞는
이 환장할 것 같은 기쁨을 모를 것이다

[img4]

님이여, 내 님이여, 가신 님이여
포위된 도청의 마지막
그 밤 새벽을 기다리다, 새벽을 만들다 쓰러져간
아아, 광주여, 내 님이여, 내 사랑이여
온몸뚱이 옭죄어오는 공포에 떨며
공포보다 선연한 분노에 치를 떨며
비로소 깨닫는다 님들의 절망과
절망보다 강인한 투혼, 그 투혼에 떠는
님들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몸서리치며
지지리도 못생긴 우리 역사를 만난다

外國商館의 늙은 머슴이
南朝鮮政府의 龍床을 어루만지며
꿈꾸는 榮華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다시 노예가 되려는
동포의 위태로운 자유를 위하여
떨치고 일어선 오늘, 6월 10일
41년 전의 6월 10일을
또 그 20년 전의 6월 10일을
그 자랑스럽고 떳떳한 우리 역사를 만난다
만나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몸부림친다

별마저 진압되어버린 캄캄한 이 밤
잠든 도시의 한복판에서 횃불을 들고 내뱉는
쉰 목청 마지막 안간힘의 절규에
사람들이 깨어나 달려오기 전에
새벽이 오기 전에
또다시 너희가
이 땅을 점령할 수도 있겠지만

똑똑히 보아두어라 외세여, 압제여
마치 갑오년의 기민행렬이 그랬듯이
너희의 땅에서 철거당한 사람들끼리 이렇게 밥을 나누며
마치 갑오년의 동학군들이 그랬듯이
핏발 선 두 눈을 흡뜨고 이렇게 돌을 던지며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살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img3]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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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님

2007.06.24 00:36
샘이 쓴 시를 읽고 싶었는데...이렇게 자연스럽게 보게 되네요.
20년 전, 뜨거웠던 청춘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80년 5월도...

광주사태 때 전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중이었죠.
목포역에서 내려 배를 타러 여객선터미널로 가는데,
역광장에 돌을 든 성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참 무서웠어요.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뭐가뭔지 영문도 몰랐으니까요.
제주도에 가서도 우린 놀수가 없었지요.
그때 당시 제주도에 없던 통행금지가 생기고, 우릴 누르는 불안하고 무거운 공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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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6.24 01:22
하하하 이런 시에 반응한다는 건...영님이가 '노땅'이라는 뜻이겠지?^^
내가 20대 시절에 저렇게 과격한 시만 썼던 건 아니야
나름 나긋나긋한 연애시도 꽤 썼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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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록

2007.06.24 11:30
채광석 시인이 돌아가셨군요.. 예전에 고물딱지 컴퓨터 팔아먹고 고생시켜드린 적있습니다. 그리고 시집 한권 선물로 받았는데..저도 한때 시써보겠다고 까분적 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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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6.24 14:36
명록아 광석이형은 87년에 죽었단다...
벌써 20년 됐어...

임선경

2007.06.24 18:13
'사흘낮 사흘밤' 은 건대 3박4일, 87년 명동성당 3박4일, 그리고 구로구청(87년대선때) 3박4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한열 장례식이었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런가? 싶네요. (직접 쓴 작가가 그렇다고 하시니까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 책 보고서 '와 심산이 누구야?' 했는데 비트가 나왔죠. 비트 보고 '어? 저 심산이 그 심산인가?'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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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6.24 18:43
구로구청...이야기를 썼으면 아마 내가 쓰다가 죽었을 거야, 열불 터져서...^^
구로구청 이야기는 [구로구청 천불천탑]이라는 시로 남겼고
[사흘낮 사흘밤]의 마지막 사흘은 한열이 장례식으로 마무리했지
적어도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던 거야...
어찌되었건...여기에 댓글 다는 인간들은 다 386들뿐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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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록

2007.06.25 10:38
동명이인이네요..이름은 같은데...저보다 한살 더 많으신 분이더군요..^^

한수련

2007.06.25 15:06
난 지금 쌤의 모습이 더 좋아요.
잘먹고 잘놀고.... 20대 때의 선생님을 봤으면 좀 무서웠을 것 같다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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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6.25 15:17
명록, 아 맞다, 채광석이라는 이름의 젊은 친구가 있었지...
수련, 나도 지금의 내가 더 좋아...다시 20대로 돌아가라고 하면...으으 끔찍해...^^

조현옥

2007.06.25 20:10
숭실대와 중앙대 사이에서 하루 걸러 최루탄 냄새를 맞고 주의깊게 뉴스보고 기침하면서 데모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손가락 하나 잘려 나가도 치를 떠는 우리네 인간들이 그토록 앞뒤 안 가리고 당장의 내 이익이 아닌 것을 쟁취하기 위해 그토록 용감하게 돌진한 이 역사가 가슴 뻐근하게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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