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6-05-05 1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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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탁족s.jpg


수락산 계곡에서 발을 씻다

심산 전각작품 [수락탁족]

 

김시습(金時習, 1435~1493)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자못 비장하고 무겁습니다. 흔히들 그를 가리켜 ‘절의의 화신’이니 ‘비운의 천재’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김시습이라는 ‘독창적인 개인’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는 매우 작은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저의 생각은 보다 가볍고 활달한 편입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산사람(山人)이었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산에 오르거나 산 위에서 보냈습니다. 뫼 산(山)자와 사람 인(人)자를 겹쳐놓으면 신선(仙)이 됩니다. 그는 산사람으로서 신선과도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저는 그를 이렇게 봅니다. 그는 산시인(山詩人)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그보다 많은 산시(山詩)를 남긴 사람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여행자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그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깊이 여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또한 풍류객(風流客)이었습니다. 술과 차(茶)와 매화(梅花)와 여인에 대하여 그가 남긴 시들은 풍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방외인(方外人)으로서 무애(無碍)를 행한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세상의 바깥에 위치시키고(outsider), 유불선(儒彿仙)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단지 산시인’이었다고 합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삶은 충만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저 여행자’였을 뿐이라고 합시다. 그 또한 하나의 완성된 삶입니다. 풍류객이기만 해도, 방외인이기만 해도, 무애인이기만 해도 대단한 삶입니다. 그런데 김시습은 산시인이요, 여행자이며, 풍류객인데, 방외인이면서, 무애인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뿐더러 차고 넘칩니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절의의 화신’이니 ‘백세의 스승’이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프로파갠더를 갖다 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사후에 유학자들과 왕들이 각각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김시습 우상화 작업’을 행한 것을 아니꼽고 비열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시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제게 있어 김시습은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저는 그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김시습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인간’인 이상 결코 존경할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다만 그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제가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김시습에 대하여 단행본 5권 정도 분량의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제1권은 [산시인 김시습], 제2권은 [여행자 김시습], 제3권은 [풍류객 김시습], 제4권은 [내 친구 김시습]입니다. 제4권에서는 김시습에 대한 신화(?)를 낱낱이 해부하여 까부수고 ‘우리 시대에 김시습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혹은 ‘심산은 김시습을 어떻게 읽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룰 계획입니다. 저의 결론은 그가 방외인으로서 무애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5권은? [전각 김시습]입니다. 요즈음에도 틈날 때마다 철필(鐵筆)을 들고 김시습의 시들을 돌에 새기고 있습니다.


매월당집1583.jpg

 

김시습의 삶에서 특히 중요한 다섯 산이 있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간 산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머무르며 삶을 보낸 산들입니다. 저는 그 산들을 ‘열경오산(悅卿五山)’이라고 부릅니다(열경은 김시습의 자(字)입니다). 제가 아직 한시(漢詩)를 제대로 쓸만한 그릇은 못되어 두운이나 각운을 맞추는 따위의 격식은 차리지 않았습니다.

 

悅卿五山 열경오산

김시습의 다섯 산

 

三角讀經 삼각독경

삼각산(북한산)에서 경을 읽고

 

金鰲閑著 금오한저

금오산에서 한가로이 글을 쓰다

 

水落濯足 수락탁족

수락산 계곡에서 발을 씻고

 

雪嶽歸依 설악귀의

설악산으로 돌아가 의지하다가

 

萬壽永眠 만수영면

만수산에서 눈을 감다

 

삼각산은 저의 모산(母山)입니다. 저는 이 산에서 산과 바위를 배웠습니다. 금오산은 경주남산의 일부입니다. 요즈음 매년 거르지 않고 찾아가 며칠씩 머물곤 합니다. 설악산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가 세상에 등을 돌리고 미치지 않기 위하여 산과 바위에 매달렸던 시기가 3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당시에 심할 때는 거의 일주일에 너댓새씩을 삼각산이나 설악산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수산은 조금 의외입니다. 저는 아직도 김시습이 왜 자신의 말년을 만수산에 의탁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수산은 부여 무량사의 뒷산입니다. 이곳 역시 여러 번 방문했지만 아직도 만수산의 매력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수락산의 매력은 최근에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화산회 산행기록을 보니 올해는 신년산행부터 지금까지 ‘오직 수락산(!)’에만 다녔더군요?(ㅎㅎㅎ) 그렇게 이 산의 구석구석을 치훑으며 다니다보니 등고선 등산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멋진 능선과 그윽한 계곡, 그리고 숨어 있는 폭포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깊이 알아갈수록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옵니다. 너무도 매력적인 산입니다. 김시습이 왜 3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의 10년 세월을 이 산에서 보냈는지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수락산은 주능선에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수락산의 진짜 매력은 계곡과 폭포에 있습니다. 제게 있어(그리고 아마도 틀림없이 김시습에게도) 수락산은 탁족(濯足)의 산인 것입니다.

 

어제는 수락산의 계곡과 폭포를 마음껏 쏘다녔습니다. 의정부시에 속해 있는 빼벌의 흑석계곡(검은돌계곡 혹은 거믄돌계곡이라고도 합니다)으로 올랐다가, 칠성대와 영락대 사이의 안부를 넘어, 남양주시에 속해 있는 청학동계곡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지난 여름의 대발견(!)이었던 흑석계곡의 선녀탕은 선녀폭포로 변해있었고, 청학동계곡의 금류폭포와 은류폭포는 물이 넘쳐나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장엄한 폭포 아래의 맑은 계곡물에 몇 번이고 발을 담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는 새겨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열경오산(悅卿五山)’의 전각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6개의 돌을 새겨야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이 ‘수락탁족(水落濯足)‘입니다. 내친 김에 제멋대로 말을 지어내봅니다. “세상이 더러우면 수락산 계곡에 들어 발을 씻어라.” 저는 아무래도 수락산 계곡을 자주 찾을 것 같습니다.


화산회레드RS.jpg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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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6.05.05 18:12

수락탁족을 새기다가 말이 길어졌네...


오랫만에 조금 긴 글을 써보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


역시 평정심을 유지한 채로, 원고청탁 따위는 받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차분히 써내려 가야 돼...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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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님

2016.05.07 08:15
수락탁족 할 때면 매월당 김시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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