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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6.12.27 20:51

끝까지 가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특검의 질주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파죽의 기세로 여러 개의 표적을 향해 거침없이 직진중이다. 오늘은‘법비’, ‘법꾸라지’ 김기춘네 집까지 압수수색했다고 한다. ‘직무유기’나 ‘직권남용’죄만 인정되어 설사 집행유예로 금방 풀려난다고 해도, 그 자가 수의를 입는 모습은 꼭 봤으면 하는데 어쩌면 그게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 기세대로라면 이번 특검이 어쩌면 헌정 사상 가장 강력한 특검이 되지 않을까?


이번 특검의 강력함은 말할 것도 없이 촛불 민심 위에 기호지세로 올라탔다는 데서 기인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민심이 아무리 강력해도 정치권력의 힘이 살아있다면 먼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쪽이다. 그런데 지금은 특검의 활동을 견제하거나 간섭할만한 어떤 정치권력도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권력 진공의 시기이다. 위임된 권력인 박근혜정권은 지금 목하 해체...중이며, 그 대신으로 눈치를 볼만한 어떤 강자도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특검은 그 자체가 곧 최고의 위임된 권력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정사상 가장 강력한 성과를 내는 특검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 하나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폭주’하는 부문이 있다. 언론이다. 굳이 JTBC나 한겨레, 경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면 정치권력을 둘러싼 온갖 추문들과 그 생산구조에 관한 놀랄만한 새 소식들을 접하게 된다. 탄핵 이후 대선과 관련된 이해관계의 작동으로 일부 보수언론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기는 하더라도 적어도 박근혜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관해서는, 즉 ‘물에 빠진 개’에 대한 몰매질에 있어서는 모든 언론이 사생결단으로 보도경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특검과 언론, 거기에 국회의 청문회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정치권력의 온갖 부정적 속성과 행태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마음껏 얻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급격히 정치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하고 있다. 이것이 이 탄핵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권력과 언론의 사술에 의해 집단적으로 치매상태를 강요받아오던 가장 낮은 정치의식 상태의 국민들조차 이제는 권력의 민낯에 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매우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매일매일 밝혀지는 권력 내부의 온갖 부정과 비리의 메카니즘에 관한 매우 상세한 사실들은 국민 일반에게 부패권력 혹은 권력부패의 보편적 속성에 관한 획기적인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그 전에는 그저 심증뿐이던 권력부패, 부패권력의 양상이 지금은 하나하나 물증과 함께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이런 학습을 거쳐 권력의 본질을 알게 된 시민들은 더 이상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바로 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 제대로 숙성하는 순간이다.


진보주의자 에밀 졸라가 아니라 왕당파 발자끄와 위선적 자유주의자 스땅달이 문학사상 위대한 리얼리즘의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발자끄와 스땅달이 졸라보다 더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던 1830년대 전후가 바로 프랑스 혁명의 지속 과정에서 몰락했지만 여전히 과거로 돌아가고자 호시탐탐인 귀족 및 왕당파와 목하 권력 독점을 노리고 있는 대부르주아 세력과 혁명의 과실을 대부르주아에게 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소부르주아 및 프롤레타리아 등 세 개의 사회세력이 솥발처럼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 어느 쪽으로도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 시기, 즉 절대권력 부재의 시기로서 모든 인민들의 사회의식과 정치감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바로 위대한 산문의 시대, 리얼리즘이 승리한 시대였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2년 전만 해도, 그때는 시의 시대였다. 너무나 거대한 비극이 벌어졌지만 그 어떤 산문적(인과적) 이해도 불가능해 비탄과 분노의 시적 분출만이 앞섰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반이 넘어선 이제는 그 비탄과 분노의 원인이 하나하나 명백한 인과의 사슬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세월호 참사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짧은 시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지적, 정서적 내면 속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가올 대선에서 그칠지, 그 너머까지 더 나아가게 될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위대한 민주주의의 리얼리즘 서사를 쓰고 있는 중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