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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6.12.20 23:01

작금의 사태에 대한 김명인(문학평론가, 인하대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2016년 12월 18일


기껏해야 한갓 책상물림의 헛된 바람에 불과하겠지만, 예기치 못하게 잠시 열린 한국 기득권체제의 파열구에 백만 시민의 힘을 모아 겨우 쐐기를 박아넣는 데 성공한 형국인 이 '11월 사태'가 '혁명'의 이름을 얻으려면 이 사태의 흐름 속에서 차제에 결국 유사민주주의체제임이 판명난 87년체제와 한국자본주의의 자생력을 소진시키고 민중의 삶을 한계 이하로 몰아넣은 98년체제의 동시적 극복이라는 전망이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해서 정치 경제 양면에서 공히 불가역적인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전망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힘이다. 과연 이 기적같이 찾아온 2016년 가을의 기회가 어느 만큼의 지속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박근혜에 대한 탄핵과 축출과 대선에서의 야당의 승리로는 혁명을 논할 깜냥도 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87년체제와 98년체제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혁명을 말하려면 적어도 냉전적 분단체제...와 야만적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중으로 기생하면서 강철의 기득권체제를 구축해 온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주체세력'과 재벌세력의 지배력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수준까지는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수야당에게 맡긴다? 개가 웃을 일이다. 대선 승리를 야당에게 헌납하고 손을 터는 것은 사실은 또 다시 반복하는 피눈물나는 패배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조차 못한다면 그것은 패배를 넘는 파국이라 하겠지만, 보수야당의 대선 승리와 보수-극우 전선의 회귀로 귀결시키기엔 이 모처럼의 혁명적 열기가 너무 아깝다. 하지만 그런 패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경험상 혁명적 정세에서 이른바 '주체역량'을 가늠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다. 매주 광화문 가두를 메우고 나서는 저 백만시민의 기세는 경이롭고 감동적이지만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보수야당의 뻔한 개량주의와 가두시민의 아나키라는 두 개의 선택지 외엔 다른 경로가 딱히 보이지 않는 이 불모적 정치현실에서 그 예측이란 게 마치 뜬구름 잡는 일과 같아서 참으로 옹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7년 항쟁이 신자유주의 초기의 호황과 '직선제 개헌=민주화'라는 소시민적 환상에 의해 혁명적 동력을 급격히 상실했다면 이 '11월사태'는 더 이상 그런 환상에 의해 훼손될 일은 없으리라는 점에서 그때보다는 폭발력도 지속가능성도 더 클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보수야당의 승리를 민중의 승리로 착각할 정도로 오늘 우리 시민들이 어수룩하지도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노신이 말했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그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길이 되는 것"이라고. 과연 그뿐일까? 젊은날의 그 무모한 확신과 과감한 직진의 기개를 더 이상 갖지 못하는 일개 노병(?)으로서 코끼리의 한 지체를 쓰다듬어 코끼리의 전모를 밝혀야 하는 군맹의 일인이 되어 그저 이렇게 책상 앞에서 마음의 애만 쓸 뿐이다.


12월 19일에는 약간은 가벼운(?) 글을 썼군요?ㅎ


알고 보니 "변기강박증"이란다. 수사도 탄핵도 한사코 거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잘못하면 감옥에 가게 생겼는데 감옥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혹시 감옥 독방에 새 변기를 설치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 일찍 사임하고 벌을 달게 받을른지도 모르겠다.

유신 말기에 감옥으로 향하던 행렬 중에 하반신 장애가 있던 한 선배가 생각난다. 그 몸으로 원래의 형량인 2년을 사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옥중투쟁을 하다가 2년인가를 추가로 살았다.

반면에 그 안에서 미쳐버린 사람들도 여럿이다. 아니 십 년 이십 년을 넘어 평생을 살다 죽어서 나온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처형 당한 사람들은 빼놓고도 말이다. 모두 박의 아비 정희가 지배하던 시대의 일이다.

아비가 한 일을 대신 갚으란 게 아니다. 그러면 연좌제가 된다. 제 아비 때문에 그 많은 멀쩡한 사람들이, 아니 말쩡한 게 아니라 너무 착하고 맑아 차마 타인의 고통을 눈뜨고 볼 수 없어 "이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죄밖에 없는 사람들이 죽고 갇히고 병드는 동안 기름진 음식에 고운 옷에 '깨끗한 변기'에 둘러싸여 공주 노릇을 해 온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기회를 가져보라는 것이다.

천하의 최순실도 지금 감옥에서 내복이며 비누며 샴푸 같은 것들 사서 쓰고 프라다는커녕 관급품 운동화 같은 것 신고 살고 있다. 암 선고를 받은 안종범이도 장기적으로 먹을 약 처방 받아가면서 감옥을 지키고 있다.

죽으라는 것도 미치라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기회에 그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주놀음'으로 살아온 박제된 인생에서 벗어나 그저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옥에 가면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곧 사람살이의 누추함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리고 변기 따위는 인생에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금방 알게 된다. 그러면 최소한 '변기공주'로 인생을 마치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헌재도 특검도 광장의 시민들도 모두 힘을 모아 그대의 갱생을 응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