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9-10 14:02:55 IP ADRESS: *.237.8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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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합니다. 오늘 집필실로 출근할 때 잠시 망설이다가...긴 바지와 긴 팔을 꺼내 입었습니다. 바야흐로 가을이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아시아나 기내지에서 '가을과 영화'라는 테마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컴터의 이런 저런 디렉토리들을 돌아다니다가 그 글을 발견했습니다. 적당한 카테고리를 찾아보았지만...마땅한 곳이 없군요. 그래서 그냥 이곳 [영화속 사랑]에 올려놓습니다.

떠나거나 떠나보내거나
가을과 영화     

[img1]

여자는 봄에 설레고 남자는 가을에 앓는다.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따위 클리셰가 가슴에 와 닿는 걸 보면 역시 가을이다. 봄이 희망을 품을 수 있어서 좋다면 가을은 그것을 떨쳐낼 수 있어서 좋다. 희망이 삶을 다채롭게 장식한다면 그것의 부재에 대한 직시는 삶을 차분하게 만든다. 봄에 바라보는 삶은 행복한 거짓말이다. 삶의 정직한 모습은 오직 가을에만 그 전모를 드러낸다. 희망의 푸른 잎들을 다 떨궈내고 오직 앙상하게 마른 가지들만으로 서 있을 때 나무는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가을을 담은 영화는 그래서 언제나 상실을 노래한다. 희망의 부재, 애정의 결핍, 삶의 유한성에 대한 서늘한 자각, 이런 것들이 가을영화의 단골 레파토리로 채택되곤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을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늘 떠나거나 누군가를 떠나보낸다. 잉마르 베르히만의 [가을소나타](Hostsonaten, 1978)에서는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와 딸이 서로를 떠나고, 이만희의 [만추](晩秋, 1966)에선 벼랑 끝에서 만나 어렵게 사랑을 맺은 두 남녀가 기약 없는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와서 선술집을 지나쳐가기는 어렵다. 이만희의 걸작을 리메이크한 김수용의 [만추](1981)를 보고 나온 날은 이튿날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까지 내리 술병들을 눕혔었다.     

가을에 떠나는 남자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것은 브래드 피트다. 에드워드 즈윅의 [가을의 전설](Legend of the Fall, 1994)은 마치 그 한 배우를 '띄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여  간지러운 면도 없지 않으나 그래도 한번쯤은 집중해서 볼만한 영화다.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미국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서부 산악지대 몬태나의 대평원에서 펼쳐지는 이 대서사시는 그 황홀한 영상미로 1995년의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눈을 감으면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사랑이 요구하는 정착과 야성이 요구하는 방랑 사이에서 그렇게 말을 달리며 수 없는 가을들을 보낸다.     

[img2]

막내 동생의 연인이자 큰 형의 아내인 수잔나(줄리아 오몬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형벌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트리스탄과 같다. 하지만 그가 '끊임없이 떠나가는 남자'가 된 데에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가슴 속에서 곰이 울어대는 소리를 듣는' 남자인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그 소리를 들어본 남자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 삶의 근원을 되묻는 원시의 야성이 가슴 속에서 포효하는데 현관 앞 흔들의자에 앉아 오늘 저녁 식사 후의 디저트로는 뭘 먹을까를 고민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떠난다. 그리고 그가 떠나가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가을의 전설]은 어떤 뜻에서 매우 두터운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삶의 무상함과 더불어 상실의 색조가 짙다. 이 영화에는 사라져가는 서부시대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잃어버린 야성에 대한 그리움이 그 저류에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마치 트리스탄처럼 어느날 문득 말 위에 올라타고서는 끝 없는 평원 저편으로 홀연히 떠나버리는 삶을 살기에는 너무도 '문명화'되어 있는 게 아닐까? 영화의 원제에 나오는 '폴(Fall)'은 그래서 어쩌면 '가을'과 더불어 '몰락'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한 가문의 몰락 혹은 가을이 되어도 떠나지 못하는 남성성의 몰락.     

장완정의 [가을날의 동화](秋天的童話, 1987)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다. 홍콩영화라면 의례히 목에 기브스를 한 사내들이 하늘을 휭휭 날라다니며 칼을 휘두르거나 권총을 난사하리라던 잘못된 선입견에 보기좋게 카운터 펀치를 먹인 예쁜 소품이다. 주인공이 홍콩누아르의 간판스타였던 주윤발이라는 사실 역시 유쾌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미국으로 유학온 홍콩처녀 제니퍼(종초홍)가 먼 친척뻘 되는 노총각 캡틴(주윤발)의 집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따스하고 가슴 아린 일상들을 담백하게 다루고 있다.     

[img3]

이 영화에서 매력적인 것은 캡틴의 캐릭터다. 그는 아무리 힘든 일상을 보내고 나도 저녁에 마작판에 끼어들어 푼돈이라도 조금 따게 되면 기분 좋게 모두에게 술 한잔씩을 돌리며 허허 웃어제끼는 그런 속없는 사내다. 이런 털털하고 한심한 캐릭터가 먼 친척뻘 되는 영계 아가씨에게 뒤늦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도대체가 가능한 설정인가? 충분히 가능하다. 중국계 이민들이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뉴욕 브룩클린의 뒷골목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하지만 가을은 떠나보내는 계절이다. 허접한 이삿짐들을 잔뜩 실은 제니퍼의 차가 브룩클린의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 잊지 못할 가을은 캡틴의 가슴 속을 단풍으로 물들인다. 헉헉대며 달려가다가 결국엔 제 풀에 지쳐 멈춰선채 떠나가는 짝사랑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캡틴의 눈동자엔 어김없이 가을빛이 물든다.     

뉴욕의 가을을 좀더 세련된 취향으로 만끽하고 싶다면 조안 첸의 [뉴욕의 가을](Autumn in New York, 2000)이 제격이다. 아마도 애드리안 라인의 [나인하프위크](1/2 Weeks, 1986) 이후 뉴욕의 도시풍경을 이만큼 아름답게 잡아낸 영화도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순전히 내 취향이지만,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라 볼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플레이보이 기질이 강한 중년의 뉴욕 여피 윌(리처드 기어)과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앳된 여대생 샬롯(위노나 라이더)의 서글픈 러브스토리는 가을 특유의 센티멘탈리즘에 더 없이 잘 어울린다.     

엷은 단풍들이 배경에 도열하고 샛노란 은행잎이 바닥을 가득 메운 센트럴파크에서의 산책장면은 그 자체로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다. 샬롯은 생애 마지막 사랑에 들떠 에머슨의 시를 읆조린다. "세상이여 나는 그대를 품을 수 없구나." 어린 연인의 건강을 염려한 윌은 조심스럽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비가 올 것 같은데…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드라이브 갈까?" 샬롯은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반문한다. "그 따위 커피 때문에 우주와 나를 포기할 건가요? 우리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그렇다. 비가 오면 어떤가? 커피 따위를 안 마시면 어떤가? 그녀에게는 생애 마지막 가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산책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img4]

[뉴욕의 가을]에는 지나치게 로맨틱하지만 불현듯 삶의 진실들을 포착해내는 멋진 대사들이 많다. 두 사람의 이별을 예고할 때 샬롯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의 러브스토리가 있을 뿐이죠. 여자가 떠나가는 러브스토리와 남자가 떠나가는 러브스토리."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이란 화석처럼 굳어져 영원불멸해지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현재의 사랑과 헤어져야 하리라.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고 탓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랑이 아니라 삶 자체가 너무도 짧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가을산책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소중하다.     

봄은 떠나는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름은 함께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다.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에 떠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어디론가 떠나거나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가을이 좋다. 이번 가을에는 내 가슴 속의 족쇄에 묶어놓은 누군가를 떠나보내야겠다.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릴 때 문득 허허롭고 외로운 저 빌어먹을 놈의 자유가 찾아온다. 그 자유가 내 가슴 속에서 곰이 우는 소리를 낼 때 나는 문득 떠나가고 싶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부시게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다. 재즈선율이 넘실대는 뉴욕도 좋고 만년설의 성채를 이룬 히말라야도 좋다. 이번 가을에도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다.

아시아나 기내지

유서애

2006.09.10 23:31
*.106.133.188
선생님... 늘 생각하는 거지만 글 너무 잘 쓰세요. 샘나욤.
아... 이 못난 제자는 언제쯤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걸까 T.T?

김의선

2006.09.11 22:10
*.97.18.212
캐릭터 중심 시나리오 쓰기에서도 그러더라고요.영화의 엔딩은 두가지다. 몇명의 주인공이 서로 포용 하거나 혼자남거나.

김기영

2006.09.13 22:46
*.48.35.121
이거요.... 옛날에 아시아나 기내지에서 보고, 제 홈피에 몰래 올려놓았던 글이예요. 이렇게 만나니 어찌나 반가운지...ㅎㅎ
profile

심산

2006.09.13 23:33
*.215.228.224
아니, 기영! 네 홈피에 몰래 올려놨다고...? 베껴쓰기 해서...?^^

이미란

2006.09.14 11:09
*.112.97.168
선생님, 그래서 우리 이번 가을에 떠나잖아요...
profile

심산

2006.09.14 14:56
*.254.86.77
흠, 그렇지...제주도! 히히 생각만 해도 신난다...^^

백소영

2007.11.16 23:24
*.212.95.146
가을날의 동화.. 저도 참 재밌게 봤었죠. 감동적이고. 지금봐도 그 느낌이 그대로 살아날까요?
그 때, 서로에게 선물하는 장면을 보면서 잠깐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며 미소지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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