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1-17 17:48:08 IP ADRESS: *.12.6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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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맑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제주올레 제6코스 쇠소깍~외돌개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제주올레를 대중화시킨 일등공신들 중의 하나는 저가항공이다. 저가항공의 매력은 합리적인 차등요금제인데, 얼마나 빨리 예약하느냐와 어떤 요일의 몇 시 비행기를 예약하느냐에 따라 할인폭이 천차만별이다. 내가 세운 최저가 기록은 왕복 비행티켓을 4만원 이하에 구입한 것이다. 세상에, 4만원 이하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니! 상상만 해도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저가항공에 중독된 제주올레꾼은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가 첫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모자라는 잠이야 비행기 안에서 깜빡 졸면 그만이다. 제주공항에 내려 샌드위치를 먹으며 콜택시를 부른다. 하도 제주의 이곳 저곳을 쏘다니다 보니 이제 지역별 콜택시 전화번호쯤이야 아예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다. 오늘의 출발지인 쇠소깍으로 가려면 서귀포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미리 제주에 와 있던 일행들과 접선약속을 잡는다. 이런 식으로 내달리다 보니 서울 마포의 집 현관을 나선지 채 세 시간도 안되어 제주의 쇠소깍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내가 김밥을 챙기고 있을 즈음 다른 일행들이 들이닥친다. 오늘의 동행은 사진작가 김진석과 시나리오작가 김영희 그리고 이태리와인 전문수입사 비노비노의 양영옥 대표다. 김영희와는 수년 전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는데, 당시 그녀가 착용했던 빨간색 햇볕 가리개 두건이 화제였다. 동네에 접어들 때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젖히며 “빨간 두건이다!” "여자 쾌걸 조로다!”하고 외쳐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그녀가 예의 그 두건을 착용하자 길 위에 웃음꽃이 터져 나온다. 올레를 걷다보면 누구라도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제지기오름의 중턱 쯤에서 마지막 일행이 합류한다. 다른 비행기를 타고 내려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혜균이 허겁지겁 따라붙은 것이다. 공항에서 조금 기다려주지 그랬냐는듯 가볍게 눈을 흘기지만 나는 모른 체 한다. 본래 백수일수록 시간 약속에 민감한 법이다. 제지기오름의 정상에 오르자 뜻밖의 풍경에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엄마 등에 업혀 올라온 어린 여자아이가 벤취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있는 것이다. 제주올레에서 만난 가장 나이 어린 올레꾼이다. 그녀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맑고 뚜렷하며 참된 숨결이다.

제지기오름에서 섶섬을 내려다본다. 굳이 이중섭의 그림을 논하지 않더라도 더 없이 회화적이다. 난해한 추상화도 아니고 근사한 수묵화도 아니다. 그저 천진한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쓱쓱 그려놓은 밑그림 같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눈이 본질을 꿰뚫어보는 법이다. 단잠에 빠져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달콤한 자태 위로 섶섬이 겹쳐지고, 섶섬의 조악하나 단순한 조형미 위로 이중섭이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중섭은 다시 단잠에 빠진 어린아이와 겹쳐지는가? 그렇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중섭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노는 아이들’ 중의 한 명이 지금 저 벤취 위에서 늘어져라 단잠에 빠져있는 셈이다.

[img2]

쇠소깍에서 외돌개에 이르는 제주올레 제6코스는 어쩔 수 없이 ‘이중섭의 길’이다. 우리에게 이중섭이란 무엇인가? 미술평론가도 미술사학자도 아닌 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좋아했지만 과연 내가 ‘화가 이중섭’을 좋아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고은(高銀)이 쓴 이중섭’을 좋아했다. 고은이 쓴 [이중섭 평전]은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던 매혹적인 텍스트다. 훤칠한 미남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그의 사진도 오랫동안 내 책상머리를 지켜온 추억의 소품이다.

나는 이중섭에게서 ‘가난’과 ‘동심’을 읽는다. 그리고 그의 천진한 동심 따위야 코웃음도 짓지 않고 단숨에 짓밟아버린 저 참혹했던 ‘시대’를 읽는다. 나는 그를 당대의 희생양으로 본다. 그의 저 유명한 폭음과 거식증 그리고 자학적 유머는 그래서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다만 ‘비참하게 살다 간 불운한 예술가’ 정도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삶과 그가 남긴 그림들은 강요된 가난과 짓밟힌 동심 사이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남긴 초라하나 아름다운 은지화(銀紙畵)를 보며 애잔한 미소를 짓게 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아닌가.

서귀포 시내를 통과해 걸으며 우리는 문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옛시절들을 만난다. 서귀포 관광극장에 붙어있는 오래된 영화의 조악한 포스터들은 그 자체로서 행복한 추억들이다. 이중섭미술관 앞에 복원된 그의 쪽방은 들여다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 좁은 쪽방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새우잠을 자며 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반드시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 언덕을 걸어내려가 서귀포 앞바다를 하릴없이 배회했을 이중섭을 상상해본다.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고 조개를 주워 하루의 먹거리를 마련한 그가 빙긋 웃으며 다시 이 쪽방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가 즐겨 그렸던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실제로 서귀포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이 시기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제주올레 제6코스는 시심(詩心)으로 가득 차 있다. 서귀포 구시가지를 통과할 때는 향수에 젖고 이중섭거주지에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소정방 폭포와 천지연 폭포 앞에 서면 그 우렁찬 기상에 창(唱)이라도 한 자락 뽑아내야 할 것만 같다. 코스가 끝나갈 때쯤 만나게 되는 조각공원에는 아예 제주와 바다를 읊은 시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의 시도 좋지만,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조미미의 노랫말도 좋다. 동백꽃 송이처럼 예쁘게 핀 비바리들/콧노래도 흥겨웁게 미역 따고 밀감을 따는/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하지만 내게는 이중섭이 너무 커다란 존재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암송했던 시, 이중섭거주지의 쪽방에 아직도 붙어있던 그 시가 여전히 긴 여운을 남긴다. 제목은 [소(牛)의 말]이다. 맑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가슴 환히 헤친다. 그렇다, 곤궁한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마음까지 곤궁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올레 제6코스를 걸으며 애틋한 향수에 젖어 생각한다. 이 파렴치한 오욕의 시대에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맑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img3]

[제민일보] 2009년 11월 21일

profile

심산

2009.11.17 19:25
*.12.64.183
마지막 사진! 영희의 저 늘씬한 다리와 빨간 두건...ㅋ

김주영

2009.11.18 11:15
*.121.66.212
이중섭 이름이 나오는데
왜 나는 남덕이라는 이름이 떠올르지..늙어서 그런가?ㅋ
profile

명로진

2009.11.18 12:59
*.192.162.202
그렇죠.
저가 항공 때문에
저도 제주행이
부담없어졌죠.
잘 읽었습니다.

최준석

2009.11.18 17:06
*.152.24.74
샘.. 글이 쫀득하니 좋네요..^^ 또 가고 싶다 올레..ㅋ

이정환

2009.11.19 09:22
*.222.56.24
수첩에 적어서까지 읽곤 했던 <소 의 말>을 여기서 다시 보니, 새롭네요. .
올레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기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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