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1-26 16:19:53 IP ADRESS: *.12.6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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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제주올레 제7-1코스 월드컵경기장~외돌개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아침 일찍 눈을 떴지만 몸이 찌뿌드드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어제 밤의 과음 탓이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김진석이 그 짙은 눈썹을 꿈틀대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몸도 날도 찌뿌드드한 이런 날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가. 나는 이미 대답을 포함한 질문을 툭 던진다. 네 카메라 방수되는 거지? 김진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두 말 없이 배낭을 꾸려 떨치고 일어선다.

매주 아니 어떤 때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산에 오르던 날들이 있었다. 이미 산행 약속을 잡아놓았는데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비가 와도 가요? 조금 늦게 도착해도 될까요? 내 대답은 오래 전에 결정되어 있다. 호우경보가 내려도 가고 지진이 나도 가. 안 기다리고 정시에 출발해. 한 두 번 함께 산행을 하다보면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게 되고, 그러면 날씨에 따라 망설이는 자들이나 약속 시간을 못 지키는 자들은 스스로 발길을 끊게 된다. 전혀 애석하지 않다. 서로를 위해서 좋은 결말이다.

실제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산행들은 대개 다 악천후와 연관되어 있다. 속옷이 흠뻑 젖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던 장마산행을 기억한다. 대설경보가 발령되자 좋아라 하고 올랐던 지리산에서의 러셀(russel)이 생각난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 동굴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던 비박의 기억과 링반데룽(環狀彷徨)에 걸려 같은 골짜기를 이틀이나 맴돌았던 조난의 기억마저 감미롭다. 맑은 날에만 찬양하는 사랑이란 얼마나 간지러운가. 그래서 오래된 재즈 스탠더드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컴 레인 오어 컴 샤인.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하는 시외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본다. 빗물이 흘러내려 뿌옇게 지워지며 뒤로 사라져가는 풍경들이 아련하다. 때마침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심수봉이 흘러나온다. 낙수물 듣는 소리가 정겨운 툇마루 같은 곳에 퍼질러 앉아 아침부터 술타령을 하기에 딱 좋은 그런 날씨다. 그렇게 상념에 촉촉히 젖어 흔들리고 있는 동안 시외버스의 종점이자 오늘 걸을 올레의 출발점인 월드컵경기장이 그 웅자를 드러낸다.

월드컵경기장은 제주올레에서 정남향의 이정표다. 제주 북쪽에 제주시가 있다면 제주 남쪽에는 서귀포시가 있다. 서귀포시 법환동에 세워져 있는 월드컵경기장은 시외버스 터미널과 바투 붙어 있는데, 제주~고산~서귀포를 달리는 일주서회선과 제주~성산~서귀포를 달리는 일주동회선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동쪽 끝의 성산은 제1코스에 속해 있고, 서쪽 끝의 고산은 제12코스에 속해 있다. 제6코스의 종점이자 제7코스의 출발점이 곧 외돌개이며, 제7-1코스는 이곳 월드컵경기장에서 외돌개까지 중산간을 타고 넘어가는 길이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자동차도로를 건너 중산간 지역으로 접어드니 곧 가슴이 먹먹해진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주민들이 모두 이주한 탓에 인적이 끊겨버린 마을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떠나갔으나 그들이 머물던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지붕이 없어진 벽 한 구석에 낡은 옷걸이가 버려져 있고, 깨진 바가지가 나뒹구는 수돗가에 말라비틀어진 파뿌리가 흩어져 있다. 사람의 손길과 잡초의 생명력은 반비례한다던가. 벽이며 대문이며 문설주며를 가리지 않고 무성하게 뻗어오른 잡초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img2]

재개발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될 것들과 잃게될 것들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다만 이 길을 걸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대상 없는 그리움을 절절히 느꼈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 그리움에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이제 곧 건설될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 아래로 사라져갈 구불구불한 흙길들, 높이 올라갈 아파트 벽 사이로 사라져갈 낮은 지붕의 단독주택들, 그 곤궁하나 정다웠던 골목길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뛰어다녔던 동네 꼬마녀석들.

소설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인류 최후의 소설가라 자처하는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붙잡아 놓으려는 안타까운 시도. 사진이란 또 무엇인가. 셔터를 누른 그 순간 이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풍광과 심상의 기록이다. 그래서일까. 김진석이 좀처럼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한다. 찰칵 찰칵 찰칵. 그의 카메라 조리개가 쉴 새 없이 열리고 닫힌다. 부서진 벽 한 귀퉁이에 프레임처럼 남아있는 창틀, 추상화처럼 남겨진 담쟁이 넝쿨의 잔해, 비에 젖은 채 텅 비어있는 아스팔트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비오는 아침이었다. 버려진 마을이었다. 이제 곧 사라져버릴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길에서 나는 심상의 엘레지를 들었다. 비 때문에 어둑해진 아침은 어둠이 깃들기 직전의 해질녘 같았다. 이제 곧 밤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소멸에 대항하려는 그 어떤 시도들도 결국에는 도로(徒勞)에 그치게 되리라. 하지만 버려진 마을만 그런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역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다만 우리는 그 언저리를 맴돌며 애틋한 그리움을 가슴에 카메라에 허공에 하릴없이 아로새기고 있을 뿐이다.

엉또폭포 앞 쉼터에 한 동안 앉아서 쉰다. 폭포는 말라 있었으나 그 장쾌했을 물줄기의 환청이 들리는듯 하다. 술 한잔 없이 지나치기에는 너무 적적한 풍경이다. 고근산에 오르니 발 아래 시야가 온통 뿌옇다. 날씨 탓인지 오가는 사람조차 드물다. 끝없이 늘어선 키 큰 나무들의 행렬이 무채색의 수묵화처럼 풍경 속으로 번져든다. 동양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라는 하논으로 접어든다. 온통 초록으로 일렁이는 하논의 모습이 오히려 생뚱맞다.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 속에 부분 컬러링(coloring)을 해놓은 듯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빗속을 걸으니 고어텍스 재킷이고 우산이고 다 무용지물이다. 손수건을 흠뻑 적신 것이 땀인지 빗물인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마음은 착 가라앉아 있는데 정신은 더 할 수 없이 명징한 그런 상태다. 삼매봉을 넘으니 다시 바다가 보인다. 그 끝에 외돌개가 서 있다. 뭍과 떨어져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 있다 하여 외돌개다. 외로움이 육화(肉化)되었다가 끝내는 바위로 굳어져버린 작은 돌섬. 그 사무치게 외로운 모습이 오히려 알 수 없는 위안을 준다. 그 의연한 모습 앞에서 존재의 유한함을 탓하며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외돌개를 위로할 수는 없다. 외돌개가 우리를 위로해줄 것이다.

[img3]

[제민일보] 2009년 11월 28일

김진석

2009.11.26 17:18
*.12.40.230
7-1코스. 올레의 절반을 걸었네요. ㅎㅎ 끝내 심산 선생님의 앞모습은 찍지 못했다는거.

이윤호

2009.11.26 18:17
*.38.48.144
기다리지않는 심산의 앞모습을 찍는 방법은 한사람은 앞에서돌고, 한사람은 거꾸로 돌면 만나게되지... 안그러면 그 빠른 걸음을 어찌 찍겠어....
profile

심산

2009.11.26 22:34
*.237.81.90
참 나 정말 억울하네...
나 '우리 동네' 내지 '우리 업계'에서는
"너무 천천히 걸어서 같이 가면 짜증나는 놈"으로 꼽힌다니까...ㅋ

이유정

2009.11.26 22:38
*.187.46.166
제가 유일하게 가본 올레.^^ 선생님 글이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보고 썼던 글이...여기 있네요. --> http://tripp.egloos.com/2469916

김만수

2009.11.27 04:56
*.222.147.55
"너무 천천히 걸어서 같이가면....." ㅋㅋㅋ

최상식

2009.11.27 05:47
*.202.184.254
쌤 빨리 안 걸으시는데 ㅋㅋ

서영우

2009.12.02 11:04
*.145.163.157
허... 다들 뛰어다니신단 말입니까? 김진석선생님... 우린 텍트 타고 다녀야 할 듯 해요 .

최준석

2009.12.02 14:15
*.152.24.74
제주도 빡시게 갔다와서 무릎이 나간 울 와잎을 봐서도 올레에 택트는 필수..ㅋㅋ
profile

심산

2009.12.02 18:14
*.237.80.197
위의 맨 마지막 사진이 [제민일보]에 아주 큰 사이즈로 실렸다
진석아, 그 신문 한 장 너한테도 줄께...^^

김진석

2009.12.02 22:41
*.12.40.230
넵 ㅎㅎ

신명희

2009.12.03 13:48
*.184.197.28
매주 토욜 아침마다 부시시한 얼굴로 신문 가지러 사무실에 가고 있습니다. ^^
아직 스크랩은 시작 못했고...^^;;;
좋은 스크랩북을 물색중입니다.ㅋ
옛날엔 8절지 스케치북에 했었는데...
간만에 하려니 어디다 해야할지...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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