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4-24 16:54:55 IP ADRESS: *.215.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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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한가한 나날들의 연속입니다. 어제는 딸의 영국문화 개인교사(영어교사를 겸한)인 Nick의 집에 다녀온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Nick이라는 친구, 매력적입니다. 오십세 쯤 되는 독신남자인데 아주 깔끔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년 전 한국의 대구에서 영어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더군요. 덕분에 김치를 무척 좋아할 뿐 아니라 직접 담가 먹기(!)도 한답니다. 저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 Nick을 위해서 고추, 고추가루, 잡곡 한 봉지...등을 챙겨 갔습니다.

영국 교육에 대한 Nick의 입장: "사람들을 다 바보로 만든다. 영국인의 90%는 아무 생각도 없는 MONKEY들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에 대한 입장은? "한국 교육은 너무 빡세다. 애들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BORING하다..."^^ 영국식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유쾌한 대화였습니다.

김치볶음밥으로 저녁을 해 먹고는 핸드폰을 켰습니다. ROAMING해갔느냐고요? 천만에요! "행복이란 무엇인가?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것이다..." 제가 믿는 단순한 진리랍니다. 그런데 영국까지 와서 통화할 일이 뭐 있겠어요? 그냥 핸드폰을 열고, 그곳에 입력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떠올려 보면서, 그들의 기록을 지워나갔습니다. 지우기 전 제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맙소사, 1500명 정도 되더군요. 그들의 이름을 보면서 얼굴과 직업 그리고 인연 등을 떠올려보다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으면 혹은 더 이상 얼굴 볼 일이 없겠다 싶으면...그냥 지워버렸습니다. 어제 하루 그렇게 지운 인연들이 한 800명 정도 됩니다.

이름을 지우면서 생각해봅니다. 이 사람과는 왜 그렇게 겉돌기만 했을까? 이 친구와는 좀 더 다정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이 새끼는 혹은 이 여자는 평생 다시 마주치지 말기를...약간은 코믹하고 약간은 슬픈 느낌이었습니다. 약간은 후회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미련이 남아있기도 하고 또 약간은 시원섭섭하기도 하고...이번 삶(THIS LIFE)에서는 더 이상 인연이 닿지 않을 사람들과 그렇게 이별했습니다. 아픈 이름들을 지울 때마다 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JOHNNY WALKER BLUE LABEL을 홀짝거리면서 말이죠...^^

그렇게 핸드폰에 새겨진 이름들을 반쯤 지우니...핸드폰도 삶도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지워진 친구들, GOOD BYE, 행복하게 살길 바래. 남겨진 친구들, HELLO, 남은 삶 동안에도 서로에게 즐거운 인연이 되길 바래...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고 찬 비들이 후둑 후둑 떨어지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네요. 냉장고가 다 비어가서 가까운 CO-OP(동네 수퍼 같은 곳)에라도 가서 장이나 봐올려고 했는데...밖에 나갈 엄두가 안납니다. 따뜻한 EARL GREY나 한잔 끓여먹고...밀린 원고나 써야겠습니다.

200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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